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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0 오후 3:38:38 입력 뉴스 > 함양뉴스

'승전, 승전' 눈부신 문태서 장군의 활약
3.1운동 함양군기념사업회 기획연재 ②



▲ 서상 문태서 장군 생가 앞에 위치한 시비

 

우리나라 각종 역사기록과 일제경찰의 보고서 등을 살펴보면 문태서 장군은 단순한 지역 의병장 수준이 아니었다. 문태서 장군의 수많은 활약 중에 가장 중요하고 역사적 의미가 있는 가선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고자 한다. 각 항목의 세부내용은 순차적으로 논의할 계획이다.

 

13도 창의군 서울진공작전에 호남창의대장으로 참가

1907년 일제는 헤이그밀사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퇴위 시키고, 통감에 의한 내정간섭을 한층 강화하기 위해 714정미(丁未) 7조약(한일신협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동시에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이에 비밀각서가 조인·교환되었는데, 이 비밀각서에 의해 81일에서 93일 사이에 걸쳐 조선군대 해산이 행해졌다.

 

군대해산으로 인해 서울에서는 군대봉기, 지방에서는 대대 및 분견대의 봉기와 탈출이 계속되어 의병전쟁에 합류했다. 원주지방의 이인영은 서울진공작전을 수립하고 전국 각지 의병대장에게 보내는 격문을 발송하였다. 격문에서 이인영은 각도 의병장에게 서울을 둘러싼 경기지방으로 진출하기를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문태서 장군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활약하던 약 1만여명의 의병들이 경기도 양주의 대진소에는 집결했다.. 여기에서 이인영을 중심으로 각 지방 의병장들이 협의하여 ‘13도 창의대진소가 다음과 같이 편성되었다.

 

13도의병대장 이인영, 군사장 허위, 관동(강원도)창의대장 민긍호, 호서(충청도)창의대장 이강년, 교남(경상도)창의대장 박정무, 진동(경기도)창의대장 권중희, 관서(평안도)창의대장 방인관, 관북(함경도)창의대장 정붕준, 호남창의대장 문태수(태현)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호남창의대장 문태수(본명 태현)이다. 양주에 집결한 의병수는 약 1만 명이나, 그 주력부대는 강원도 원주지방으로부터 민긍호·이구재·이은찬이 인솔한 6,000명이다. 먼 거리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부대들은 극히 그 일부분이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나 지역의병대장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각 도별 의병부대는 최소한 500명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문태서 장군 의병부대는 일본군을 상대로 국제적인 선전포고를 하고 진행한 대일본 전쟁에서 중책을 맡을 수 있을 정도의 능력과 전투력을 보유하고 참전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장수읍 공격

1908129일 시작된 ‘13도 창의군 서울진공작전은 일본군의 세밀한 정보망과 선제적인 공격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으며, 여러 가지 사건으로 ‘13도 연합의병부대는 해산하고 문태서 장군도 의병부대를 이끌고 본거지인 덕유산으로 돌아왔다.

 

이후 충청, 경상, 전북을 넘나들면서 활발한 대일항전을 전개하였으며, ‘서울진공작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소규모 의병부대와 수시로 연합하여 대규모 작전을 펼쳐나갔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장수읍 공격이다. 1908410일에 전개한 장수읍 공격은 공격에 의병 100여명이 투입되었고, 퇴각전투에 150여명의 의병이 동원된 대규모 대일전쟁이었다. 주력부대의 공격과 예비부대의 추격저지 역할이 잘 이루어진 가장 모범적인 전투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에는 활동했던 지방 의병부대는 50명 내외의 소규모 부대였으니, ‘장수읍 공격에 동원된 의병부대는 연합된 대규모 부대라고 판단할 수 있다.

 

구체적인 전과는 대한민국의 기록과, 일본의 기록이 서로 다르고 전해오는 내용 또한 달라서 거론하기에는 부담스러우나 대규모 의병전쟁을 통해 일본군의 조선침략에 맞섰다는 사실과, 이로 인해 지역민들의 대일저항의식이 한층 고조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19093월 무주군 2곳에 문태서장군 송덕비가 건립된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고창곡전투

문태서 장군 의병부대의 조직력과 활약상이 널리 알려지자 의병의 세가 점차 확대되었으며, 무주·장수 등지로 활동무대를 넓혀갔다. 19085월 초순 문태서 의진에 대한 첩보를 입수한 일본 병영에서는 그 의진을 섬멸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 병영의 책략을 이미 짐작하고 있던 문태서는 의병진을 장수의 계북 방면으로 이동 행군하면서 적을 유도하였다. 그는 의병부대를 50명 내외의 소규모 편성하여 각 지역에서 산발적인 전투를 진행하였다. 57일 의병들이 적과 싸우기에 편리한 계북면 농소·어전·문성 등지에 이르자 일제히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 싸움에서 일본군 15명을 사살하였고 20명을 사상하였으나 의병 7명이 죽고 25명이 부상당하였다. 그러나 적으로부터 25자루의 총기를 획득하기도 하였다.

 

장수 계북 방면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문태서 장군은 의병진을 덕유산 구천동으로 이동하였다. 19081127일 그는 무주군 부남면 방면으로 출동한다는 정보를 흘리고 부남면 고창곡으로 미리 출병하였다. 일본군이 고창곡으로 출병하자 미리 양쪽 언덕에 잠복시켜 놓은 부대에게 돌격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지리적으로 불리한 일본군은 앞 뒤 좌우에서 한꺼번에 급습해오는 의병을 당해내지 못해 전군이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적군은 43명이 사살당하고 총기 50자루를 빼앗기는 참패를 맛보았다. 일본군은 고창곡에서의 막대한 피해와 참패를 복수하고 문태서가 이끄는 의병을 섬멸하고자 거창·합전 등 7개 읍에 주둔하고 있던 수비대 200여 명으로 하여 연합토벌대를 편성하게 된다.

 

7읍 연합토벌부대 격파

문태서 장군 의병부대의 혁혁한 전공에 계속되자 그 규모도 점차 늘어났다. 찾아오는 의병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700여 명이 넘는 대부대가 되자, 박문영·전성보·신택광·박춘실을 의병장으로 임명하여 장수군 계북면 土沃洞·구천동, 무주군 안성면 칠연계곡, 덕유산 남쪽 경남 거창지역에 각각 주둔하게 하였다.

 

이러한 소부대로의 재편성 이후 문태서 장군이 직접 지휘하는 의진은 봉곡에서의 잠복을 통하여 일본군 9명 사살, 무주군 안성면 장항리에서 일본군 3명 사살, 거창읍에서 일본헌병대 대장 1명과 헌병 2명 사살, 덕유산에서 일본군 수비대와의 교전 끝에 일본군 3명을 사살하는 등의 큰 전과를 올렸다.

 

일본군은 고창곡에서의 막대한 피해와 참패를 복수하고 문태서가 이끄는 의병을 섬멸하고자 거창·합전 등 7개 읍에 주둔하고 있던 수비대 200여 명으로 하여 연합토벌대를 편성하여 덕유산 일대를 완전 포위하고 전투태세를 취하여 포위망을 좁혀왔다. 그러나 문태서는 지리에 밝아 험준한 산골짜기를 이용하여 공격해 오는 일본군을 완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문태서 장군은 덕유산에 의병을 집결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일본군이 7읍 연합부대를 편성하여 진격해 오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그는 일본군을 깊은 골짜기로 유인하고 매복의병들에게 일본군이 골짜기 깊숙히 들어왔을 때 사격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싸움은 30시간 이상 계속되었고 의병이나 일본군 다 함께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싸움으로 일본의 7읍 연합부대장 및 장교 3명과 군졸 32명이 사살했다.

 

7읍 연합토벌대와 벌인 전투의 효과에 대해 김성진 전 함양문화원장은 문태서연구(p262~264)’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첫째, 일본군과의 대규모 전투로 인해 의병들의 정신력 및 전투력이 강화되었다.

둘째, 덕유산지역을 활용한 소규모 군사진지가 개발되었으며, 부대 분산 및 재배치가 이루어졌다.

셋째, 덕유산 주변의 소규모 의병부대와의 연합전선이 강화되어 군사력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넷째, 다양한 형태의 소규모전투 승리로 일본군 전투력이 저하되고 의병의 사기는 높아졌다.

다섯째, 일본군의 산악전투능력을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향후 작전에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5. 이원역 습격 및 완전소각

덕유산 전투에서 승리한 문태서 의진의 사기는 그 어느때 보다 더 고양되었다. 문태서는 서울에 있던 일본 통감부를 직접 습격하여 통감 이토를 암살할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문태서 장군은 우선 1대에 30명 씩 3대로 편성하고 1대를 선발대, 3대는 군량 및 기타 물자의 수송을 맡게 하였다. 먼저 1대를 출발시키고 그 다음 2, 3대의 순으로 출발시켰다. 1대가 북진하던 중 충북 옥천군 이원역을 지나려 할 때, 일본 사람들이 경부철도를 이용하여 한국에서 생산된 중요한 물자들을 수송하려고 차에 싣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이것을 본 의병들은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어 이원역을 습격하여 일본의 경비병과 일본 사람들을 사살하고 역사와 화물차에 방화 소각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이원역소각전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통감부에서는 옥천 이원역을 습격한 문태서의 호남의병을 철저히 토벌할 것을 명령하였다. 따라서 문태서의 호남의병대가 계획하였던 경성 통감부 습격과 이토의 살해계획은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애석한 일이었다. 이원역소각전 이후 일본군의 신무기와 맞서 정면공격을 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문태서는 모든 의병을 덕유산으로 일단 회군하게 하였다.

 

그는 회군한 뒤, 무주·장수·거창·함양·안의 등 각 지역으로 분산시켜 유격전을 감행할 수 있도록 모든 대원을 재편성하였다. 이렇게 의병을 재편성하여 각 지역에서 유격전을 전개하고 있을 때, 한일합병의 비보가 들려왔다. 이로써 문태서의 호남의병도 일본관헌이나 그에 따른 시설물을 습격하는 등 항일지하운동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글: 3.1운동 함양군기념사업회

 

 

 

박정주 기자(hy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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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인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문태서 의병대장을 이렇게 되살려주시니 고맙기도 하고 죄송한 마음도 있습니다 2019-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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