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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31 오전 11:34:04 입력 뉴스 > 함양뉴스

문태서 장군, 영각사 부근에서 싸우다.
3.1운동 함양군기념사업회 기획연재 ④



▲ 문태서 장군 의병부대의 첫 전투가 벌어진 영각사 일대. 의병부대는 영각사에 자리잡은 일본군을 동서남북 사방에서 포위해 공격했다.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부대와 일본군 간의 첫 전투는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영각사 부근에서 벌어졌다.

 

함양읍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문태서 장군의 부대가 서하면 일대에 나타났다는 급보를 받고 출동한다. 이 전투는 일본군 수비대가 경무국장에게 보고한 공문에 비교적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다음은 19083월 작성된 일본경찰의 공식문건이며, ‘폭도에 관한 편책중 전라도 33권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발신자 : 남부수비관구사령관 츠네요시 타다미치

수신자 : 경무국장(경찰총장) 마츠이 시게루

제목: 314일 함양수비보14 5중대 카와하라부대 신기(안의 서북방 6)부근의 전투상보

 

1. 적괴 문태서가 인솔하는 적도 약 오십명이 신평(안의 서방 약 3)에 침입하였다는 급보를 접하고 카와하라 특무조장과 부대원 7명은 313일 오후 3시경 함양을 출발하여 오후 7시 반경에 대필봉(안의 서방 2)에 도착하여 적의 정보를 수집하였다. 약 오십명의 적은 312일 마을에 침입하여 금품을 강탈한 후 오늘 새벽 우전마을(안의 서북방 3)를 향하였다.

 

2. 13일 오후 10시 대필봉을 출발하여 야간행군을 하여 우전에 도착해서 해당 적들이 거기마을(안의 서북방 약 3리반)으로 향한 것을 알고 급행군하였다. 다음날 14일 오전 6시 거기마을에 도착하여 적의 정보를 수집하였다. 적괴 문태서는 부근에서 배회하고 있던 다른 집단들을 통일하여 백여명이 되어 13일 밤에 육십령(안의 북방 오리)방향으로 이동하였다한다. 따라서 오전 7시 거기를 출발하여 오후 1시 신기에 도착하였다. 당시 신기 북방 약 2000미터 영각사 북방고지상에 23적도의 전망초같은 것을 보고 또 영각사에 수명의 적도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즉시 영각사를 향하여 행진하여 영각사 동방 300미터 고지에 도달하였으나 소나무숲 때문에 전방을 바라볼 수 없었다.

 

3. 오후 220분 경 영각사 동방 약 천미터의 고지상으로부터 수발의 사격을 받았다. 동시에 영각사 서방 약 천오백미터 고지상에서도 약 50명의 적도가 출현하였다. 잠시 후 다시 약 40명의 적도는 영각사 남방 약 600미터 계곡에서 함성을 지르고 돌격하여 왔으나 수분후 이를 격퇴 및 궤멸시켜 쫓았다. 그러나 아직 두 방향의 적은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따라서 우선 동방의 적을 격퇴하고 이어 서방고지의 적을 향하여 공격하면서 전진하였다. 적은 우리들이 비밀리에 움직이는 것을 퇴각한 것으로 잘못 판단하고 다시 영각사에 집결하고자 하였으므로 맹렬히 공격하여 북방으로 궤멸시켜 쫓았다. 추격을 한지 두시간이나 지났으나 어두운 밤, 소나무숲 등으로 인하여 적들의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적의 사상은 미상이나 버리고 간 시체는 다섯구이며, 적의 우두머리는 문태서로 약 백십명이다.

 

이와 관련하여 3.1운동 함양군기념사업회에서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연구를 한 결과, 보고서는 왜곡과 과장이 섞여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문태서 장군의 의병부대는 서하면 소재지인 송계마을 건너편에 있는 신기마을(일본은 신평이라고 표기함)에서 친일활동을 하고 있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의병활동에 필요한 자금과 식량을 확보하고 있었다. 의병들의 활동을 당시 안의군 소재지였던 현 안의면소재지에 위치한 안의경찰분견소에 파악하고 함양읍에 주재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에 전달되었을 것이다.

 

당시 함양군에는 중대 규모(200여명)의 수비대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기록에는 조장과 부대원 7명이 313일 오후 3시경 함양에서 출발하여 오후 730분경에 대필봉에 도착하였다고 되어있지만 50여명의 의병부대, 특히 3회 연재물에서 밝힌 바와 같이 거의 모든 의병들이 총기를 소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투를 벌이기 위해 고작 8명의 군인들을 파견하였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함양에서 대필봉(안의 서방 2)까지 4시간 30여분이 걸려 도착한 부분은 함양읍에서 출발하여 지곡면 덕암리를 거쳐 서하면 호성부락으로 넘어가는 길을 이용하면 도착시간은 기록과 일치한다. 도착한 대필봉이 지금 어디인지 지명을 확인할 수 없다

 

의병부대들은 신기마을에서 자금과 군수물자를 마련한 후 서하면 우전마을로 향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의병들은 신기마을에서 우전마을로 행진할 까닭이 없다. 우전마을은 기백산 기슭의 막다른 계곡에 있으며, 서상면 남덕유산 기슭에 위치한 영각사와는 반대방향이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13일 오후 10시 대필봉을 출발하여 야간행군을 하여 서하면 봉전마을에서 황석산 정상방향으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 우전에 도착해서 의병부대들이 거기마을로 향한 것을 알고 급행군 하였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일본군들이 움직였다면 함양의 지형을 전혀 모르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10시에 대필봉을 출발하여 우전마을로 갔다면 당시의 도로사정이나 산림의 사정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행군이다. 그리고 313일은 음력으로 210일임으로 달빛의 도움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생소한 화림동계곡을 자기 동네인양 야간행군을 한다는 것은 기록이 잘못되었거나, 지명을 제대로 파악하지못한 까닭이라 생각된다.

 

일본군은 우전에서 의병들이 거기마을로 이동하였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다시 우전마을에서 거기마을로 출발하여 14일 오전 6시에 거기마을에 도착한다. 거기마을에서 문태서의병부대가 주변에서 배회하고 있던 무리들을 규합하여 규모가 백여명이 넘었으며, 13일 밤에 서상면 육십령방면으로 이동하였다는 정보를 수집하였다. 일본군들은 다시 오전 7시에 거기마을을 출발하여 오후 1시에 서상면 상남리 신기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요약하자면 13일 오후 3시에 함양을 출발하여 오후 730분경 대필봉에 도착했고 10시에 대필봉에서 우전으로 향했고 우전을 거쳐서 오전 6시에 거기마을에 도착했으며, 7시에 거기마을을 출발하여 오후 1시에 서상면 상남리 신기마을에 도착하였다. 일본군들은 한마디로 전혀 생소한 산악지대에서 24시간을 행군하였다는 것이다. 일본군의 동선은 거의 산악지역의 소로나 길이 없는 곳 52이다.

 

통상 산악지역 행군 시간은 평지의 두배 이상이 소요된다. 길이 잘 나있는 도로에서 성인의 걸음걸이는 시간당 4킬로미터 정도이다. 13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리이나 당시의 도로사정과 지형을 감안하면 24시간 행군으로는 불가능한 작전이다.

 

여기서 문태서 의병부대의 입장에서 기록을 재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은 상상이 가능하다. 서하면 소재지 송계마을과 서하 신기마을은 개울하나 건너 이웃마을이며 경작지가 비교적 넓은 곳이다. 우전마을은 황석산 기슭에 자리잡은 화전민촌 수준이다. 거기마을은 산간지대이긴 하나 비교적 경작면적이 넓은 마을이다. 그렇다면 문태서의병부대는 2곳에서 활동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신기마을과 거기마을에서 친일분자들에게서 의병활동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징발했을 것이며, 일부는 일본군의 혼선을 유도하기 위해 안의쪽인 우전마을로 향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서하 신기마을에 50여명이 나타났고 거기마을에서 인근을 배회하던 무리를 규합한 규모가 100명이라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거기마을에서 서상면 도천마을을 거쳐 오산, 동대, 신기마을을 거쳐 남덕유산 정상부근으로 이동하는데는 의병들의 입장에서는 3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일본군들은 거기마을에서 내려와 서하면 송계를 거쳐 다시 서상면소재지 칠형정부락을 거쳐 육십령까지 올라갔다가 신기마을로 내려온다면 약 16.8를 행군하게 된다.

 

비교적 인적이 많은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6시간 정도 소요되었다면, 위에서 지적한 일본군의 이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내린 연구팀의 결론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

 

일본군은 신기마을에 도착하여 망원경으로 남덕유산과, 영각사, 그리고 주변을 관찰한 결과, ‘신기 북방 약 2000미터 영각사 북방고지상에 2~3개의 적도 전망초같은 것을 보고 또 영각사에 수명의 적도가 있음을 발견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정보에 따라 영각사 주변에서 활동하고 있는 의병부대를 추적하여 나아갔으나 짙은 소나무숲 때문에 전방을 바라볼 수 없었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함양에서 출발한 일본군이 서상면 신기마을에 도착하기까지의 행군일정은 기록과 일치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본군이 지나온 지역의 대부분은 영각사주변의 산림지대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역 형세에 익숙한 의병들의 전투능력을 간과하지 않는 이상 이렇게 빠른 이동은 죽음을 무릎 쓴 모험이기 때문이다.

 

또다른 중요한 사항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군이 제아무리 신식총과 뛰어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지라도, 일개 군지역에 배치된 수비대 8명으로 100명이 넘은 의병부대를 추적했다는 기록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과연 그렇게 무모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의병이 오합지졸이었다는 말인가? 더구나 24시간 계속된 행군으로 지친 상태에서 고지에서 기다리고 있는 의병부대와 전투를 벌이겠다는 일본군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문태서장군의 의병부대가 7읍 연합수비대와 벌인 전투에서 보여준 전투능력을 독자들은 계속되는 이야기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드디어 일본군 기록에 의한 최초의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314월 오후220분경 영각사 동방 약 해발 천미터의 고지상에 자리잡은 의병부대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동시에 영각사 서방 천오백미터 고지상에서도 50명 가량의 의병부대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잠시 후 다시 약 40명의 의병들은 영각사 남방 약 해발 600미터 계곡에서 일본군을 향해 돌진하였다.

 

일본군의 기록에 의하면 동, , 남쪽 방향에서 의병들이 공격해 왔다. 영각사는 지형상으로 보면 북쪽은 남덕유산 정상으로 해발 1500미터, 동쪽은 800미터, 서쪽은 700미터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남쪽은 해발 600미터이고 경사도가 낮은 비교적 평지에 속하는 곳이다. 의병들은 일본군을 영각사 부근으로 유인하여 북쪽, 동쪽, 서쪽 고지에서 사격으로 지원하였으며, 남쪽 입구를 봉쇄하여 일본군의 퇴로를 막았다. 일본군의 사기를 꺾은 후에 남쪽 의병부대가 백병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수 분 후에 돌격하는 의병들을 격퇴하였다고 기록하였으며, 고지에서 사격을 통해 지원하고 있는 의병부대들을 향해 공격하면서 전진하였다고 하였다. 일본군들은 은밀하게 움직이면서 고지에 있는 의병들에게 접근하였기 때문에 의병들은 일본군들이 물러간 줄 오판하고 영각사에 다시 집결하고자 했지만 일본군들의 강력한 화력에 밀려 다시 산위로 올라갔다고 했다.

 

위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백명이 넘는 의병부대와 8명의 일본군이 전투를 벌였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기록이며, 당시 함양지역에 주둔했던 일본군의 규모가 중대급으로 약 200명 정도였다. 이 중 최소 100여명이 전투에 참여했을 것이며, 이러한 병력이 있어야 선발대, 본대, 후발대로 편성하여 경계를 하면서 행군할 수 있다. 의병규모를 50명정도로 파악했다가 후에 100여명으로 수정해서 기록하고 있고, 말미에 110여명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본군은 전투에 필요한 최대의 병력을 동원했으리라 판단한다. 그리고 전투는 의병들이 펼쳐놓은 전장에서 펼쳐졌기 때문에 일본군의 피해는 엄청났을 것이나 아쉽게도 우리는 그 기록을 확인할 수 없으며, 다만 동서남북에서 의병들이 공격했고, 백병전까지 벌였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일본군의 피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며, 이후 문태서 의병부대의 활동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추격을 계속했지만 어두운 밤, 소나무숲 등의 장애로 인해 추격을 포기했으며, 전투를 마무리 짓고 주변을 확인한 결과 5구의 사체를 발견하였으며, 기타 사상자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의병부대를 문태서장군이 이끌고 있었으며, 규모는 백십여명이었다고 적고 있다. 5구의 의병시체를 발견했다면 일본군은 얼마가 죽었을까? 그들은 그러한 기록은 남기지 않고 있다.

 

이렇게 문태서장군은 일본군과의 맹렬한 의병전쟁을 통해 거물급 의병부대 지도자로 등장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도 모른 채 그냥 의병장 문태서로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쪽에서 남겨둔 기록만 검토하더라도 역사에 길이 남을 의병전쟁을 덕유산을 중심으로 한 산악지대에서 전개했던 의병대장 문태서를 오늘날에 다시 복원해야 하는 것은 후손들인 우리들이 반드시 해야할 일이다. 다음 글에서는 19083월 중에 있었던 작은 전투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글: 3.1운동 함양군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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