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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7 오전 9:27:35 입력 뉴스 > 함양뉴스

문태서 장군, 대규모 의병전투 준비하다.
3.1운동 함양군기념사업회 기획연재 ⑥



 

덕유산 호랑이 복원사업 중 하나로 문태서장군연재를 시작한지 벌써 6회째이다. 여러 가지 역사자료가 전산화되어 있는 까닭에 이전의 연구에 비하여 훨씬 많은 참고자료를 활용할 수 있었으며, 집단연구를 하는 까닭에 다양한 해석을 덧붙일 수 있었다.

 

연재물과 근거자료는 문태서장군 사적지에 기념관을 조성하여 전시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국권을 되찾기 위하여 흘리신 피와 땀을 후손들이 기억하고 되찾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 후손들에게 선조라고 대접을 받을 수 있을것인가?

 

6회에서는 문태서장군이 지휘하던 의병의 규모와 범위를 살펴보려고 한다. 사용한 자료는 일본측 기록인 폭도에 관한 편책과 독립운동사 자료 의병편에 실린 대한제국 공식 문건 1건이다.

 

<보고서 1, 한국독립운동사 사료 11>

전라북도 운봉군 읍내 생 전 주서(조선시대 승정원의 정7품 관직) 박문달(본명 박봉양) 오십세 가량 이자는 최근 의병대장이라 칭하면서 부하 사십명을 이끌고 새로 봉기하여 경상남도 거창, 안의, 함양군 지방을 배회하고 있다고 한다. 이 자는 지방에서 꽤 유명한 인물로서 본인의 부하는 다른 폭도에 비하여 세고 악랄하고 또 무주군의 문태수라고 하는 폭도의 수기와 연락을 취하여 빈번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전라북도 운봉군 출신인 박문달은 조선시대 승정원 7(조선시대 18품계 중 제13등급의 품계)을 지낸 전직 관리이다. 본명은 박봉양이며, 동학혁명군의 주력부대인 김개남부대를 운봉군에서 물리치고 여세를 몰아 동학군이 점령하고 있던 남원성을 탈환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군대해산 이후 일시 의병에 가담하였으나 후에 의병활동을 접고 일본군에 귀순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지역에서는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학군과의 전투에서 확보한 상당량의 무기도 보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역 유명 인사가 거병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기에 일본의 입장에서는 우려할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무주군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태서 장군과 빈번한 연락을 취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였기 때문에 큰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박문달의 활동범위이다. 거창, 안의, 함양군을 배회하였다고 하였으나, 당시 해당 지엮은 문태서 의병부대 관할에 있었기 때문에 운봉, 남원 장수 등에서 활동했을 것이다. 해당지역 일본군들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실제로 전북 산악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활동지역을 경상도로 옮겨서 보고했다고 볼 수 있다.

 

<보고서 2, 폭도에 관한 편책중 전라도 84(1908)>

발신자 : 한국주차헌병대장 아카시 겐지로우

수신자 : 경무국장 마쓰이 시게루

적도 문태수는 잠시 종적을 감추었으나 최근 전북 무주군 남방 오리 부근에 출몰하였다. 그가 인솔하는 무리는 사오십명으로 혹은 한부대가 되고 혹은 소수집단으로 나뉘어 움직인다. 곧바로 이들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아직 전과가 없다.

 

일본군들은 문태서 의병부대를 계속 추적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태서 의병부대는 거의 노출되지 않았다. 그 까닭은 각 지역에 분산되어 활동하였으며, 각 부대별로 독립된 전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은 문태서 의병부대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때로는 10여명 단위로, 때로는 50여명규모의 단위로, 때로는 몇 백명 단위로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전투의 지도자가 문태서로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여 의병들의 활동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주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역주민들이 제공하는 문태서 의병부대에 대한 정보도 부정확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일본군들도 이러한 상황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 이어지는 보고서이다.

 

<보고서 3, 폭도에 관한 편책중 전라도 124(1908)>

발신자 : 한국주차헌병대장 아카시 겐지로우

수신자 : 경무국장 마쓰이 시게루

전북 금산군 부근의 폭도상황

전라북도 금산, 무주, 용담 부근은 적괴 문태서가 인솔하는 폭도 수십명이 활동하고 있다. 문태서는 부하들을 대함에 있어 엄정하기 때문에 약탈행위 등이 적다. 따라서 주민들도 비교적 선의를 표하는 것이 있다.

 

전라북도 금산군, 무주군, 용담군(현 용담면)에서 주로 활동한 부대는 문태서 의병부대의 선봉장을 맡고 있었던 박춘실이다. 박춘실은 190958130명의 동지와 더불어 유진하고 있던 문성(文城) 동북쪽에 떨어진 산중에 이르러, 이곳에서 적군과 교전하던 중 의병 13명이 순국하고 박춘실은 체포되었다. 1909717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14년 전주형무소를 탈옥하려다 실패하였다. 그후 대구 형무소로 이감되자 벽을 파괴하고 동지 100여명을 탈옥시킨 후 본인은 자진순사(自盡殉死)하였다. 문태서 의병부대 선봉부대인 박춘실 이하 의병들은 해당지역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부당한 약탈이나 폭행등을 저지를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일본군들이 세금을 징수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역주민들이 곡식을 현금으로 바꾸는 것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려 지역주민들로부터 호응을 얻었으며, 이러한 활동으로 19094월 해당지역에 문태서장군 송덕비가 두 곳에 건립된 것만 보더라도 해당 보고내용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보고서 4, 폭도에 관한 편책중 전라도 124(1908)>

폭도수령 문태수과 마중길, 염도중, 유종완 등은 총수 약 일천명으로 그 중 일부는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충에, 일부는 경상남북도 안의, 거창, 삼가, 지례군 등의 산중에, 일부는 전라북도 무주군, 용담군, 진안군, 장수군, 금산군, 고산군 등의 각 군에, 일부는 충청남도 한산군 내포 부근에 잠복하여 활동하고 있어서 조만간 삼남 지방에는 커다란 소요가 일어나리라고 한다.

 

일본측이 작성하여 12월 전국 해당 기관에 통보한 내용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문태서장군을 폭도수령으로 표현하고 있다. 적괴에서 폭도수괴로, 폭도수괴에서 폭도수령으로 점점 명칭이 거창하게 변해가고 있다. 활동지역을 충청남도 한산군(서천군 한산면), 충청북도 보은군과 영동군, 경상남도 서북부 전지역, 경상북도 김천지역, 전라북도 동부 산악지역 전지역으로 표현하고 있다. 당시 전북지역에 속해있던 구례군은 현재 전라남도이다. 이렇게 따지면 충청남북도,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를 활동지역으로 하는 대규모 의병부대를 지휘하고 있었으며, 그 규모가 일천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실로 대단한 의병부대가 아닐 수 없다. 각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문태서 의병부대들은 해당지역의 행정구역 단위로 분할이 되어 배치되어 각 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조만간 대규모 전투가 있을 것이라 염려하면서 일본군은 토벌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보고서 5, 한국독립운동사 의병편>

발신자 : 전라북도 관찰사 이두항

수신자 : 내부대신 송병준

관내 금산경찰서장의 보고와 관련하여 폭도 수괴의 종적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폭도 수괴 문태수는 지난 달 하순 이후 종적이 묘연하여 수소문 하던 차에 최근 소문에 의하면 문태수는 경성에 출행한 듯 하다. 혹은 비밀히 탄약을 매입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의심이 되어 계속 사실을 확인중에 있다.

 

대한제국의 행정권이 아직까지 일본에 넘어가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공식적으로는 도 관찰사가 내무부장관에게 보고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전북 관찰사 이두항이 내무부장관 송병준에게 보낸 공문에 따르면 문태서장군은 서울에 잠입하여 무기를 구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태서장군 공훈록에 따르면 이병열 이하 7명의 무기장들이 문태서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2회 연재물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각 부대마다 신식총도 10여정 이상 보유하고 있었다. 신식총 탄약은 무기장들이 만들 수 없었던 까닭에 무기상을 통하지 않으면 구입할 수 없었을 것이며, 문태서장군은 직접 서울에 잠입하여 탄약확보선을 확보하려고 시도하였을 것이다. 문태서장군이 부대에 머무르지 않고 종적이 묘연하였다는 보고를 할 정도의 정보망은 한국인 관찰사나 일본측도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문태서장군은 대대적인 의병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글: 3.1운동 함양군기념사업회.

 

 

함양인터넷뉴스(hy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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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문장은 사업회에서 연구 작성했다고 하더라도 참고자료, 문헌자료등을 말미에 상세하게 표시해야되는것 아닌지요? 2019-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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