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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4 오전 9:46:37 입력 뉴스 > 함양뉴스

언론과 주민들이 칭송한 문태서 장군
3.1운동 함양군기념사업회 기획연재 ⑦



▲ 무주 구천동에 있는 문태서 장군 비석

 

지난 6회에서는 문태서 장군은 덕유산을 중심으로 인접지역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지역 의병들을 통합하여 지휘하면서 대규모 의병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번 연재에서는 이러한 준비가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4건의 자료를 통해 1909년에 벌어진 활발한 의병활동을 보고하기 시작할 예정이며 문태서 장군의 또다른 이름 문태익을 만날 수 있다.

 

<보고서 1, 19091월 대한제국 공식문건>

발신자 : 전라북도 관찰사 이두항

수신자 : 내부대신 송병준

 

폭도 내습에 관하여 111일경 금산경찰서장의 보고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18일 오전 3시경 폭도 수괴 문태수의 부하 김모는 40여명의 단원들을 인솔하고 무주군 남면 갈거리에 쳐들어와서 식사를 징발하고 이서면 방향으로 향했다는 내용이 무주주재 순사들로부터 보고되었다.

둘째, 19일 밤 수괴불명의 폭도(문태수의 부하일 것이다.) 30여명이 금산군 부동면 평촌마을에 쳐들어와서 동장댁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고 다음날 아침 영동 방면으로 향했다.

 

무주군을 주무대로 활동하고 있던 문태서 장군 통솔하에 있던 의병부대 중 무주군 서쪽 지역인 남면(현 진안군 정천면), 이서면(현 완주군 이서면)과 인접지역인 완주군 동쪽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부대는 의병장 김동신이 지휘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문태수 부하 김모는 김동신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금산군 부동면에 출현한 의병부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그 까닭은 해당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부대가 많았기 때문이다. 두 건의 보고내용에서 추출할 수 있는 사실은 소규모 의병부대의 규모는 50명을 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식사를 징발했다’. ‘동장댁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고등의 사실에서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의병들의 활동이 민간인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다만 피해를 주지 않고 있다고 간접적으로 시인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언론보도, 대한매일신보 1909117일자>

1909117일 일요일 의병장 문태익이 무주군 덕유산에서 수달 동안 군사를 조련하고 구천동으로 진출, 왜병과 교전하여 많은 왜적을 사살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대한제국 시대에 발행된 신문으로서 1904718일 창간되어 1910828일 종간되었다. 한글과 영문으로 창간되어, 뒤에 국한문판도 발행되었다. 일제의 침략에 저항했고 민족의식을 드높여 신교육에 앞장섰으며 애국계몽운동에 크게 이바지했다.

 

특히 순한글판은 여성들의 개화와 자주의식 고취에 공헌했고 우리말 보급과 발전에 이바지했다. 이 신문에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문태익(문태서 장군의 또다른 이름)의병부대의 본거지를 덕유산으로 지정하고 있으며,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치를 수 있는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의병전투를 통해 많은 왜적을 사살하였다.

 

다만 보도상의 지명인 구천동은 깊은 산중이어서 일본군들이 들어올 수 없는 지역이다. 덕유산 주변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헌병대, 경찰서, 군대 등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190811~ 19091월 사이에 있었던 의병전투 중 문태서장군이 활약하던 지역내에서 벌어진 전투 일지는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고 있다.

 

같은 기간 중에 벌어진 전투는 다음과 같다.

 

1908-11-05 함양. 거창 등지에서 의병장 文泰渟(문태서의 다른 이름)이 활약하여 다수의 다수의 부하 모집해 결사 동맹. [출전] 고종시대사 6.

1908-11-27 의병 50여명, 전북 鎭安 동북방 高昌洞에서 진안수비대와 교전. 의병 11명 전사. [출전]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2 p. 658.

1908-12-05 의병 60, 경남 安義郡 西下面 葛峴洞 내습. [출전]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2 p. 689.

1908-12-05 의병 60여명, 전북 長水 北方에서 장수분견소 헌병과 교전. 의병 12명 전사. [출전]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2 p. 676.

1908-12-07 의병 약32, 鎭安 서남 약30리서 교전. [출전] 독립운동사 I. 의병항쟁

1908-12-07 의병 32, 전북 錦山郡 錦山面 서남방에서 鎭安수비대 토벌대 7명과 교전. 의병 7명 전사. [출전]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2 p. 680.

1908-12-07 의병 60여명, 전북 長水 北方 40리 지점에서 장수분견소원과 교전. 의병 12명 전사. [출전]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9 p. 190. 12 p. 675.

1908-12-20 의병 20여명, 任實郡 南面 金山洞 日語學校 습격. [출전]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2 pp. 621-622.

1908-12-20 의병 34, 전북 任實 부근에서 임실헌병분견대와 의병 3명 전사. [출전]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9 p. 200.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2 p. 697.

1908-12-24 의병 30, 경남 安義 북방 5리에서 일본군헌병분견소원과 교전. [출전] 황성신문 1909. 1. 8.

1908-12-27 의병 약20, 山靑 서북 약40리서 교전. [출전] 독립운동사 I. 의병항쟁

1909-01-02 南原지역 의병 10여명이 社洞 坊新村 公錢領收員 晉根永家에 침입. 군용금 强徵. [출전]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3 p. 83

1909-01-08 의병장 文太守 부하 金某40여명을 인솔 茂朱郡 南面을 침입. [출전]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3 p. 109

1909-01-09 李錫庸 의병대, 任實巡査駐在所에 격문 송부. [출전]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3 p. 106

1909-01-13 南原지역 의병 11명이 雲峰郡 北上面 朴奉玄家에서 군용금 모금. [출전]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3 p. 129

1909-01-13 南原 의병 10여명이 南原邑 城南坊丹峙洞 일대 各戶 수색. [출전]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3 p. 116

1909-01-20 전북 李錫庸 의병대 20여명이 任實軍 上東面에서 임실헌병분견대를 공격. [출전]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3 p. 346

1909-01-29 의병 약30, 任實 동방 약30리서 교전. [출전] 독립운동사 I. 의병항쟁

1909-01-29 전북 의병 20여명이 任實郡 大運峙에서 임실헌병분견대와 접전. [출전]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3 p. 478

1909-01-29 전북 의병 70여명이 茂朱에서 일본군 무주헌병분대와 충돌. 교전. [출전]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3 p. 486

 

다음은 19093월 작성된 일본경찰의 공식문건이다.

발신자 : 경상남도 경찰부장 이키 칸

수신자 : 경무국장 마쓰이 시게루

 첫째, 310일 오후 9시경 폭도 30명이 안의군 북사면으로보터 남쪽 능선을 넘어와 서상면 영서동에 침입하여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 전라도 수비병 7명이 추적하여 공격을 가하여 칠명을 체포하고 화승총 9, 보따리 3개를 노획하였다.

 둘째, 311일 안의군 북상면 월성동 산수동 분계동 당산동(마을간 약 3) 방면에 수괴 문태서, 전성범, 박춘실, 유종환 4명이 연합하여 부하 백명을 집합하여 행동하려 하는 정보를 입수하고 거창경찰서, 동 수비대, 거창, 안의 양헌병대는 연합토벌의 목적으로써 오후 10시부터 행동하였다. 그리고 거창경찰서는 일순사 3, 한순사 6명으로 한순사는 변장정찰에 종사하였다.

 셋째, 311일 오전 9시부터 거창수비대 6명은 안의군 신기동을 거점으로 각 척후로 파견하였다.

 

문태서장군 의병부대 본진이 주둔하고 있었던 월성계곡은 당시 안의군에 속해 있었던 북상면을 중심으로 주변의 위천면, 고제면까지도 의병부대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던 곳이다.

 

월성계곡에서 북쪽 능선을 넘으면 무주, 금산, 영동, 보은까지 전투를 할 수 있었으며, 남쪽 능선을 넘으면 함양, 안의, 산청까지 전투를 할 수 있었고, 동쪽 사선을 넘으면 김천, 황간, 거창, 합천까지 전투를 할 수 있었으며, 서쪽 능선을 넘으면 진안, 장수, 완주, 임실, 남원 등까지 전투를 할 수 있었다. 남덕유산 능선을 따라 함양 백운산, 지리산을 거치면서 24시간 정도 걸으면 닿는 곳이 구례이다.

 

능히 전투를 할 수 있는 지역이다. 이러한 지리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위에서 언급한 의병부대의 활동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월성계곡에서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보고서의 영서동-월성계곡에서 보았을 때 서상면 상남리는 덕유산과 황석산을 잇는 고개의 서쪽에 있음)로 올라오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의병부대의 이동속도를 감안하면 3시간 정도이다.

 

 311일 거창지역 일본군경들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문태서장군 의병부대들이 연합작전을 벌이기 위해 백여명 이상이 집결하였다.

 

전날 서상면 상남리로 넘어온 의병 30명은 무슨 역할을 했을까? 아마 안의지역에 있던 헌병, 수비대, 경찰 등을 유인하는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 까닭에 이튿날 거창지역 헌병, 수비대, 경찰들로만 연합토벌작전을 실시할 수 밖에 없었다. 연합토벌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전투를 했다는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으며 조선인 순사 6명을 주민으로 변장시켜 첩보수집을 했다는 내용이 전부이다.

 

그 까닭은 거창지역 일본군경만으로는 문태서의병부대를 상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인들로 이루어진 척후조(정찰부대) 6명을 파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일본군들의 움직임은 반드시 정찰조를 파견하고 본대가 움직인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서상면 영각사에서 치러진 전투에 일본군 7명이 투입되었다는 기록은 사실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다. 이처럼 문태서의병부대는 상황에 따라 부대규모를 달리하면서 의병전투를 전개하였다.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해당지역에서 의병전투를 전개하면서도 필요에 따라서는 대규모 전투도 벌였던 문태서장군은 지역주민들로부터는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지난 연재에서 일본은 공식문건에서 조차도 문태서장군 의병부대에 대한 주민들의 신뢰를 인정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해당지역 주민들은 이러한 사실을 송덕비 건립을 통하여 확인해 주고 있다. 19093월에 전라북도 관찰사 이두항이 내무대신 박제순에게 보낸 공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관내 금산군 남원군 양 경찰서장의 폭도에 관한 보고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무주군 안성 일안면 죽장리(전북 무주군 안성면 죽천리 죽장마을)와 갈마리(전북 무주군 안성면 죽천리 갈마마을)에 지난해부터 출몰하고 있는 폭도 수괴 문태서의 송덕비를 건설하였음을 발견하고 즉시 제거하였으며, 송덕비 설립자를 취조한 바 해당지역의 주민들이 한 것으로 생각되나 누가 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그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竭忠輔國 下濟萬民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바로세우고 아래로는 만백성을 구제하시어

名振四海 難盡其德 그 이름 온 세상에 떨치시니 그 큰 덕은 잊혀지지 않으리!

爲國義兵大將 文泰瑞之碑 (위국의병대장 문태서 지비)

戊申 四月 日 19084

 

둘째, 수괴불명의 폭도 4명이 321일 밤 1시경에 운봉군 남면 수철리 임원 배윤범집에 처들어와 배윤범을 구타하고 한국돈 65냥을 탈취하여 도주하였다.

셋째, 수괴 유종환은 부하 40명을 인솔하고 321일 오후 9시경 전북 용담군(현 진안군 용담면) 일동면 작월리에 내습하여 동군 부남면 방면으로 향하였다.

넷째, 310일 무주군 주재순사 일본인 1명 조선인 1명은 무주군 유가면(현 무주군 적상면 일대)에 출장하여 숙박하던중 9일 오후 12시경 동면 외사리, 길왕리 양 지역(현 무주군 적상면 사천리 일대)에 수괴불명의 폭도 30여명이 내습하여 출장 순사의 소재를 수색하고 있는 겉 같다고 하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 사실을 확인함과 동시에 일면 안성수비대에 급보로 연락하고 나카무라 상등병 이하 5명이 동일 오후 5시에 도착하였다. 中村 上等兵 以下 五名同日 午後五時 來着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동면 이동 이장의 급보에 의하면 폭도 30(총기 휴대)이 내습 출장 순사의 소재를 수색하고 상유리(현 무주군 적상면 삼유리 상유마을)로 향하였다고 하는 정보를 입수하였으므로 군대, 경찰의 연합대는 동면 중류리(현 무주군 적상면 삼유리 중유마을)로 향했지만 폭도들은 재빨리 이를 탐지하고 부남면(적상면 서북쪽)방향으로 도주하였다.

 

전라북도 남원군과 금산군(당시에는 전라북도 소속) 경찰서장의 보고를 전라북도 관찰사 이두황이 내무대신 박제순에게 전한 내용에 따르면 19084월에 무주군 일안면 죽장리와 갈마리에 건립한 문태서장군 송덕비를 발견하고 제거하였으며, 건립 주동자를 찾아내려고 했지만 실패하였다.

 

19084월에 건립한 송덕비를 일년이 지난 19093월에 발견하여 제거하였다는 것은 해당지역이 다음과 같은 상황에 놓여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첫째, 해당 지역에서는 대한제국의 행정력과 일본군경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을 정도로 문태서 의병부대의 영향력이 막강했다.

둘째, 문태서장군의 선봉장인 박춘실이 해당지역 인근인 장수군 계북면 출신이어서 지역주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셋째, 무주군 출신으로 독립운동 유공자 표창을 받은 사람은 23명이며 그 중 의병활동으로 표창을 받은 사람이 18명이다. 무주군에서는 의병활동이 일상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이다.

 

송덕비 건립시기를 놓고 무슨 까닭에선지 많은 연구자들이 잘못된 해석을 내리고 있다. ‘폭도에 관한 편책에 나타난 내용만 가지고 판단한다면 분명하게 무신 4월로 날짜를 새겨놓고 있다. 무신년은 1908년이다. 19084월에 송덕비가 건립되었다. 보고된 송덕비 내용은 순서가 뒤섞여 있다. 竭忠輔國 下濟萬民 爲國義兵大將 文泰瑞之碑 名振四海 難盡其德 戊申 四月 日 순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竭忠輔國 下濟萬民 名振四海 難盡其德 爲國義兵大將 文泰瑞之碑 戊申 四月 日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래서 연구회에서는 수정된 순서에 따라 배열하고 해석을 덧붙였다.

 

전라북도 관찰사 이두항의 보고서는 그 밖에 일상적인 의병활동을 첨부하고 있다. 일본군경들도 의병들의 활동을 정탐하기 위해 지역에 자주 나왔으나 의병들의 수색과 습격을 항상 염려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의병부대의 규모는 앞서 보고했던 부대와 비슷한 3~40명이다.

 

이번 호에서는 3건의 보고서와 1건의 신문기사 및 문태서장군 의병부대 전투로 여길만한 의병전투일지를 검토해 보았다. 1908년 하반기에 문태서의병부대는 막강한 전투역량을 구축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190811월부터 19091월 사이에 매우 활발한 의병전투를 전개하였다. 그 활약상은 서울에도 널리 퍼져 대한매일신보에서 보도하고 있다. 이후에도 대한매일신보는 문태서장군의 활약상을 지속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문태서장군은 일본군경과 싸우면서도 지역주민들의 안위를 고려하여 활동한 까닭에 일본군경들과 대한제국 관리들의 방해를 무릅쓰고 해당지역 주민들은 자발적인 노력으로 송덕비를 건립했던 것이다. 비록 파괴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지만 건립역사, 내용, 장소가 분명하게 남아 있는 까닭에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3.1운동함양군기념사업회에서는 이러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해나갈 것이며, 지역주민들의 적극적인 후원과 관심이 함께 할 때 덕유산 호랑이 복원사업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바로잡습니다. 

2회 연재에서 지명확인을 충분히 하지 못한 채 기록만으로 해석을 하여 지역을 잘못 표기하였기에 바로 잡습니다.

 

일본측 기록으로 해석하여 현 지명으로 바꾸어 2회에서 적었습니다.

安城 一安面 九千洞 山寺二安面 沙灘里

安城 一安面 九千洞 山寺 안성 일안면(현 무주군 설천면 일대)

二安面 沙灘里 안성 이안면(현 무주군 안성면 일대)

 

하지만 무주군지 등 각 종 역사기록과 주변 마을지명 등을 검토한 결과 일본측이 기록하고 있는 안성 일안면, 이안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안성 일안면(현 무주군 설천면 일대) 무주군 일안면(현 무주군 안성면 남부지역 일대)

무주군 일안면 3개리(현 전북 무주군 안성면 공정리, 죽천리, 공진리)

무주군 일안면 죽장리(현 전북 무주군 안성면 죽천리 죽장마을)

무주군 일안면 갈마리(현 전북 무주군 안성면 죽천리 갈마마을)

안성 이안면(현 무주군 안성면 일대) 무주군 이안면(현 무주군 안성면 소재지 및 중부 지역 일대)

무주군 이안면 3개리(현 전북 무주군 안성면 장기리, 덕산리, 금평리, 사전리)

무주군 이안면 사탄리(현 전북 무주군 안성면 공정리 사탄마을)

 

-글: 3.1운동 함양군기념사업회

 

 

함양인터넷뉴스(hy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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