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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1 오후 12:19:24 입력 뉴스 > 함양뉴스

문태서 장군의 확고한 부대운영 원칙
3.1운동 함양군기념사업회 기획연재 ⑧



▲ 전북 장수군 계북면 건재길 7에 위치한 문태서 장군과 박춘실 장군의 전적비

 

문태서장군 의병부대는 덕유산을 중심으로 충남북, 전남북, 경남북에 걸쳐 광범위하게 포진되어 있었으며, 소규모 부대단위로 운영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앞에 연재했던 기록에서 확인하였다.

 

문태서장군 의병부대는 광범위한 지역, 다양한 소규모 단위 부대로 운영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규율이 잘 잡혀져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지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지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는 말은 자발적인 복종도 포함되지만 반역과 배신에 대한 댓가를 지역민들이 충분하게 인지하고 있었다는 말로 바꿀 수 도 있다. 일본과 대한제국 관리들에 대한 복종은 곧바로 의병에 대한 배신행위임이기 때문에 지역주민들에게는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주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문태서장군 의병부대는 어떻게 운영되었을까? 일본측이 남겨놓은 기록을 분석해보면 문태서의병부대가 가지고 있었던 부대 운영 원칙 몇 가지를 추출할 수 있다.

 

밀고자에게 철저한 응징을 가하다.

19093월 작성된 폭도에 관한 편책중 경상도 33권에서는 경상남도 경찰부장 이키 칸(현 경남경찰청장)이 일본통감부 내부 경무국장 마쓰이 시게루(현 경찰청장)에게 보고하는 내용에서 그러한 것을 찾을 수 있다.

 

지난달(19092) 23일 정오 12시경 폭도 40여명이 안의군 서상면 학현동에 쳐들어와서 민가 3호를 태우고 또 지역주민 박화룡(50), 박동현(18), 서명오(29) 3명을 총살하고 돌아가는 길에 전주 3본을 절단하고 전선 40척을 절취하고 전라북도 장수군 지방으로 도주하였다. 방화 살인의 원인은 211일 같은 마을에서 숙박 중이던 폭도가 헌병대의 야습을 받은 것은 마을 주민이 밀고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보복하기 위해 쳐들어온 것이다.”

 

문태서장군 의병부대 중 당시 안의군(현 함양군 안의면)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던 부대는 전성범 부대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까닭은 전성범 의병장의 고향이 서하면 봉전마을이며, 그 묘소도 해당지역에 있다. 서상면 학현동은 현 서상면 중남리 수개마을이며, 서상면 소재지에서 약 1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현 수개마을로 추정하는 까닭은 수개마을의 시작을 현재 동네 뒤쪽에 있는 학골에 3~4가구가 살기 시작함이라고 서상면 홈페이지에 적고 있다.

 

1909211일 밤에 마을에서 숙영 중이던 의병부대들이 주민들의 밀고에 의해 일본헌병대의 야습을 받았다. 피해규모는 알 수 없으나 일본헌병대가 공격해왔다는 말은 안의헌병분견소 병력이 파견되었다는 뜻이다. 의병부대는 최소 2일 이상 머물렀을 것이며, 그 동안 의병부대의 숙영정보가 일본헌병측에 전달되어 야습이 가해졌을 것이다. 수개마을에서 숙영하던 의병부대들은 서북쪽 깃대봉(해발 1014m)로 피난하여 백두대간을 타고 육십령을 거쳐, 본거지인 거창군 월성계곡 쪽으로 후퇴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반민족 행위에 대한 보복이 223일 이루어졌다. 밤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정오 즉 12시에, 지역주민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밀고에 대한 죄를 물은 것이다. 박화룡, 박동현, 서명오 3명을 공개적으로 총살하였으며, 전주 3개와 전선 13미터를 절단하여 일본헌병의 통신을 차단시켰다. 의병에 대한 적대행위를 공개적이며 대중이 보는 앞에서 철저하게 응징한 것이다.

 

지역주민들에게도 확고한 의병부대 운영원칙 

19093월 중순 전라북도 관찰사 이두황은 내무대신 박제순에게 보내는 공문을 살펴보면, 동년 319일에 문태서장군 휘하 중군부대인 전성범부대(추정)는 무주군 유가면(현 무주군 적상면) 소재 마을에서 숙영을 하였으며, 지역주민들의 지원을 받았다. 그리고 지역주민들에게 의병활동에 필요한 지침을 하달하였다. 보고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수괴 문태수의 부하 전모(전성범으로 추정됨)31명의 부대를 인솔하고 319일 오후 7시경 무주군 유가면 여범리에 쳐들어와서 마을 이장 이윤중 집에서 일박하고 다음날 같은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정화집의 집에 쳐들어가 올해 정월 마을주민들로부터 징수한 벼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지, 만약 이를 다른 곳에 매각할 때는 일가족을 참살하고, 가옥을 불질러버리겠다라고 협박하고 같은 날 오후 8시경 유가면 하산리(현 안성면 하산리) 방면으로 향하였다는 보고가 있었다.”

 

동년 319일에 30명 남짓으로 구성된 전성범부대(추정)는 무주군 유가면 여범리(현 무주군 적상면 사천리 혹은 사산리에 있는 마을)에 들어와 이장집에서 일박을 하였다. 목적은 아마 의병전쟁의 당위성과 주민들의 협조 및 의병모집 등의 선무활동을 하였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일본군경들에게 제공할 경비 마련을 위해 곡식 징수를 맡고 있는 정화집(일진회 간부 추정)에게 징수한 곡식 판매 여부을 확인하고, 의병장의 허락없이 곡식을 판매할 시 당하게 될 징벌을 고지하였다. 즉 의병활동의 당위성 , 의병활동 협조 및 참여 등을 주제로 공개적인 선무활동을 펼쳤으며, 위반시 처벌내용을 공표하였다.

19094월 전라북도 관찰사 이두황은 내무대신 박제순에게 보내는 공문을 살펴보면 문태서장군 의병부대의 또다른 부대 운영 원칙을 확인할 수 있다. 헌병의 폭도토벌에 관하여 전주경찰서의 보고요지는 다음과 같다.

 

“41일 진안헌병분견소 모리모토 상등병 외 보조원 2명은 용담군분견소에 연락교통 활동을 마치고 부대로 돌아오던 중 용담군 조림리(현 무주군 정천면 봉학리 정천면소재지)에서, 용담군 일서면 조명에 폭도 100여명이 쳐들어와 식사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모리모토 상등병 이하 3명은 동지에 도착하여 적정을 정찰하였다. 적은 61~62명으로 모두 총기를 휴대하고 있었으며 용담군 대벌리(현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로부터 용담군 일서면 조명마을에 쳐들어와 식사 후 재차 대벌리 방향 대동맥(현 진안군 주천면 동남부 1000m 고지대)을 향하여 이동하였다. 그리고 해당 부대의 수괴는 문태서의병부대에 소속된 별장 전상신이었다. 이상의 적정으로 추적하였으나 별 효과가 없어서 부대로 복귀하였다 한다.”

 

보고서에 나타난 지역과 지형을 세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무주군 정천면, 진안군 주천면, 진안군 용담면은 전북 동북부 무진장이라 불리는 험한 산악지역이다. 해발 1000m 이상의 산들이 연접해 있고, 당시 도로가 개설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군경의 세력이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진안헌병분견소와 용담헌병분견소 간에 연락은 인편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진안과 용담의 중간 지점에 정천면이 있다. 용담군 일서면 조명(현 진안군 용담면 와룡리 수몰지역)에 들어온 의병들은 진안군 주천면 산악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문태서장군 산하 지역의병부대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해당부대를 이끌고 있는 의병장을 전상신으로 지목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까닭은 문태서장군 산하에는 별장이라는 직이 없었고, 전상신이라는 의병장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부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보고서를 작성할 때 全相信, 全成凡, 全成範을 혼용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해당부대의 의병장 이름은 그렇다 하더라도 해당지역에 활동하고 있던 지역의병부대 의병장은 확실하게 문태서 의병부대 중군장 전성범은 아니다. 전성범의병장은 319일 무주군 적상면에서 선무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47일 밤에 무주군 무주읍에서 문태서장군의 후방 안전을 위해 출전하였다. 따라서 41일 전북 진안군 용담에 나타난 의병부대는 전성범의병부대가 아닌 김동신 의병부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김동신 의병부대는 다른 지역의병부대에 비해 규모가 비교적 컸으며, 해당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판단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해당지역 출신으로 구성된 의병부대를 해당지역 출신 의병장이 이끌며, 해당지역을 책임진다 

 

19094월 초순에 전라북도 관찰사 이두황은 내부대신 박제순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이 보고서에서는 문태서장군의 의병활동 개시 시기를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의병부대 운영과 관련된 중요한 원칙을 추출할 수 있다.

폭도출몰에 곤하여 금산경찰서장의 보고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재작년(1907) 이래로 금산경찰서 관내에 출몰하여 폭거를 자행하고 있는 적괴 문태수는 작년 10월 이후 그 종적을 알 수 없었는데 이번달(4) 5일 오후 4시 비단옷을 입고 1명의 부하를 따르게 하고 금산군 부동면(현 무주군 무주읍 내도리 및 방우리 일대)에 도착하여 경성으로부터 돌아오는 도중에 여비가 부족하여 이곳에 들렀음을 알리고 동민으로부터 식사를 제공받고 1박한 후 다음날인 6일 무주군 부남면 지방을 향하여 이동하였다. 다음날인 7일 오후 10시경에 폭도수괴 문태수의 부하 별장이었던 박선봉(박춘실) 혹은 전성범은 부하 30여명을 인솔하고 해당지역에 도착하여 동장을 불러서 문태수가 통과한 일이 없었는지를 확인하고 무주군 부남면 방면으로 향하였다.

둘째, 48일 밤 폭도 3명이 무주군 상곡면 상조리(현 무주군 적상면 괴목리)에 쳐들어와 김정현의 처 최가(29)를 납치하여 어디론가 사라졌다. 1항에 관하여는 엄밀 수색 중임.“

 

문태서 장군이 의병전쟁을 시작한 시기에 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하지만 각 의견들은 비공식적인 자료나, 인용에 인용을 반복하여 생산된 자료를 근거로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까닭에 덕유산 호랑이 복원사업 연재물에서는 의병전쟁 개시시기를 특정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의병전쟁 기록 자료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폭도에 관한 편책에 나타난 자료를 검토해보면 최소한 1907년으로 확정할 수 있다. 하지만 충분한 연구와 검토를 거친다면 1907년 상반기로 확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문태서 장군은 덕유산을 근거지로 하여 충청, 전라, 경상 의병들을 통합하여 지휘하고 있었으며, 탄약이나 총기 확보, 전국의 의병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의병전쟁 등을 위해 여러 차례 경성에 다녀왔음을 각 종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0945일에도 경성에 비밀리에 다녀온 문태서 장군은 오후 4시에 현 무주군 무주읍에 비단옷을 입고 수행 부하 1명과 같이 도착하였다. 서울 기준 일몰시각이 저녁 7시인 45일 오후 4시이면 한낮이다. 문태서 장군은 한낮에 무주군 소재지에 무주읍에 도착하여 자기가 서울에 다녀온 경과를 보고하고 무주읍에 들른 까닭을 대중들에게 공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비가 부족하여 무주읍에 들렀다는 말은 의병활동에 필요한 무기 확보에 자금이 필요하다라는 말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비단옷을 입고 수행원을 대동한 의병대장이 여비가 부족하여 무주읍에 들렀겠는가? 당일 무주읍에 도착하여 지역주민들에게 공개적인 설명을 하고 동민들로부터 식사를 대접받았다는 말의 의미는 지역 유지들을 불러모아 서울에 다녀온 경과보고를 했다는 말로 대체할 수 있다. 문태서장군이 무주읍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선봉부대는 무주읍에 사는 지역유지들에게 동 행사를 알리고, 지역유지들을 소집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모든 행사를 편안하게 마친 문태서장군은 하루 밤을 보내고 다음날 1박을 하고 무주군 부남면으로 향했다.

 

보고서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어지는 부분이다. 6일 아침 문태서장군이 무주읍을 떠난 후 7일 밤 10시경 문태서 의병부대 선봉장 박춘실 혹은 중군장 전성범이 부하 30명을 인솔하고 무주읍에 도착하여 동장에게 문태서 장군 행적에 대하여 탐문하고 문태서장군이 향한 부남면을 향해 이동하였다는 부분과 무주군 적상면 괴목리에 의병 3명이 쳐들어와 김정현의 처 최가(29)를 납치하여 어디론가 사라졌다.

 

문태서 장군의 행적은 철저하게 일본군경에게는 비밀이었으며, 이러한 행적은 선봉부대인 박춘실에 의해 보호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일본군경들은 7일 밤에 무주읍에 들어온 의병장이 박춘실인지 전성범인지 확정하지 못했지만 지금까지의 기록으로 볼 때 선봉장의 역할과, 해당지역에 밝은 박춘실이라고 확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8일 밤 3명의 의병들이 무주군 적상면 괴목마을에 들러서 김정현의 처 최가를 납치하여 사라졌다. 어떻게 이 부분을 연결할 수 있을까? 박춘실 의병장은 문태서 장군의 행적이 누군가의 밀고에 의해 일본군경이나 밀정들에 의해 보고되었다고 판단했다. 무주읍과 적상면 괴목리 원괴목마을은 불과 8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만약 김정현이 원괴목을에 거주하고 있었다면 읍내를 내왕하기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면 더 쉬웠을 것이다. 당일 문태서장군이 주관하였던 지역유지모임에 김정현이 참석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고 이 경로를 통해 전라북도 관찰사 이두항에게 보고가 가능했다. 이러한 사실을 파악한 의병장은 밀고자를 확정하고 철저히 응징하기 위해 적상면 괴목리를 찾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다시금 문태서장군 의병부대의 부대 운영 원칙을 확인할 수 있다. 의병에 대한 적대행위를 철저하게 응징한 것이다. 또한 문태서장군의 모든 활동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하고, 사후에 철저하게 마무리했다.

 

문태서장군은 의병전쟁을 가능한 범위내에서 공개적으로 수행하였으며, 지역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였다. 이러한 공개적인 활동은 사전 준비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정보수집활동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다음 보고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4월 중순경 경상북도 경찰부장 경시 유아사 히데토미는 내부경무국장 마츠이 시게루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오전록(33)는 성주군 명암면 수남동에 쳐들어와서 411일 동장 등 주민을 향하여 자기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마을을 초토화시키겠다고 협박하다가 동민들에게 체포되었다. 따라서 취조한 바 응답하는 내용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서 고문을 통해 자백을 받은 결과는 다음과 같다.

자기의 수괴는 문태수(당사십세가량)로 전라남도 의주군 의풍의 산중에 있어서 부하 200명을 인솔하고 있다. 자기는 김, , , , 5명과 정찰의 임무를 띠고 음력 310일 의풍을 출발하여 지례군 청암사부근의 주막에서 1박하고 다음날인 11일 김씨외 4명은 청암사에, 자기는 개령, 김산, 성주의 삼군으로 출발하였다. 또 음력 325일 밤 앞에서 적은 청암사 부근에서 회합하는 약속을 하였다. 오전록은 촌전식 총 2, 화승총 1, 1점 등을 휴대하고 있기 때문에 엄중 취조 중에 있다.

 

오전록은 문태서장군의 첩보부대였던 것 같다. 성주군 명암면 수남동은 현재 성주군 벽진면 매수리이다. 문태서장군의 첩보 수집 범위가 경북 성주군까지 확장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경북 김천, 성주까지도 문태서장군 의병부대가 활동하고 있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 오전록은 무슨 까닭에선지 주민들에게 공개적인 협박을 했고, 지역주민들은 혼자서 행동하고 있던 오전록을 진압하여 일본헌병에게 넘겼다. 체포 당시 오전록은 촌전식 소총 2(1890년대 일본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개인 소총-당시 최고의 성능을 가진 소총 일명 무라다소총), 화승총 1, 1점 등을 소지한 상태였다. 개인이 소지하기엔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의 개인 화기 및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다소 의아한 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보수집을 위한 소규모 부대가 일본군이 가지고 있는 최신식 소총을 2정이나 소지하고 있었다는 말은 의병부대들이 많은 전투를 통해 일본군으로부터 신식 무기를 노획하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오전록을 체포 후 고문한 후 받아낸 자백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문태수장군 의병부대에 소속되어 있으며, 문태서장군은 전라남도 의주군 의풍의 산중에 은거하고 있으며 규모는 200명이다.

둘째, 음력 3105명의 정찰조와 함께 개령(현 김천군 개령면), 김산(현 김천시), 성주 삼군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하여 의풍을 출발하여 청암사(현 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마을)에서 1박하고 혼자서 3개 군 정보수집을 위하여 출발하였다.

셋째, 325일 밤 청암사에서 다시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등등

오전록은 일부러 전라북도 무주군을 전라남도 의주군으로, 무풍군을 의풍군으로 진술하고 있는 까닭에 일본군은 진술이 엉터리여서 고문을 통해 자백을 받아내었다. 고문을 통해서 확보한 정보는 문태서장군은 활동지역보다 훨씬 광범위한 지역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정보수집활동이 있었던 까닭에 무주읍에서 지역유지들을 모아놓고 경성에 다녀온 성과를 보고할 수 있었으며, 반역자를 처단할 수 있었고, 자기의 행적을 일본군경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었다.

 

8회 내용은 양이 좀 많았다. 하지만 문태서의병부대의 부대 운영 원칙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다소간 많은 보고서를 참조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일본군경이나 대한제국 관리들이 남겨놓은 자료들을 활용해서 몇 가지 원칙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부대 운영 원칙을 찾아내었다.

첫째, 의병활동의 당위성, 의병활동 협조 및 참여 등을 주제로 공개적인 선무활동을 펼쳤으며, 위반시 처벌내용을 공표하였다.

둘째, 문태서장군의 모든 활동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하고, 사후에 철저하게 마무리했다.

셋째, 문태서장군은 활동지역보다 훨씬 광범위한 지역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넷째, 해당지역 출신으로 구성된 의병부대를 해당지역 출신 의병장이 이끌며, 해당지역을 책임진다.

다섯째, 일본에 기생하는 조선인들의 의병에 대한 적대행위를 철저하게 응징한 것이다.

 

이러한 부대 운영 원칙이 있었던 까닭에 광범위한 지역에서, 지역주민들의 지원을 받아가며 강력한 의병전쟁을 오랫동안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태서장군의 기록을 쫓다보면 후손으로서 부끄럽기도 하고, 가슴뿌듯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렇게 자랑스러운 선열이 있었기에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대한민국이 가능했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글: 3.1운동 함양군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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