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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8 오후 2:03:26 입력 뉴스 > 함양뉴스

문태서 장군 의병, 곳곳에서 활약
3.1운동 함양군기념사업회 기획연재 ⑨



▲ 문태서장군 의병부대가 군자금을 요구했던 거창 황산 원학고가

 

1909년은 문태서장군 의병부대가 가장 맹렬하게 의병전쟁을 벌인 해이다.

 

그 중에서도 4~5월은 그 활동이 더욱 두드러진 기간이다. 이 시기에 군자금 모금, 의병빙자 화적 처벌, 친일분자 납치, 의병 모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419일부터 520일까지 일본측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러한 활약상을 확인할 수 있다.

 

문태서의병부대는 군자금을 지역토호(유지)들로부터 강제징수하고 있었고 일본군은 이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각 지역에 수비대를 두고 토벌에 전력을 기울였다.

 

목숨을 건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인 문태서의병부대

 

1909419일 일본군 거창수비대장이 남부수비관구 사령관을 거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마츠이 시게루에게 다름과 같이 보고했다.

 

1. 418일 거창경찰분서장으로부터 거창 북방 약 4리 황산에 폭도가 쳐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깜짝 놀라 병력을 급히 모아서 장교 이하 46명을 인솔하고 오전 4시 폭도토벌을 위하여 해당 지역으로 출병하였다.

2. 18일 오전 7시 황산촌을 포위하고 양반 신종삼의 집에서 폭도 1명을 생포하였다. 이 자를 고문하였으나 사실을 자백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래와 같은 증거가 있어서 폭도임이 확실하다.

A. 강우의진 대장 문태익의 기명이 있는 약전징발의 격문, 장수재무서의 관인을 소지하였다.(관인은 거창경찰서에 인도하였다.)

B. 지역주민의 말에 의하면 이 폭도는 문태익의 부장 강진여로 장수를 습격한 후 무주 전투에서 패하고 황산에 쳐들어와 신종삼 집에 들러서 금 1300냥을 내놓으라고 강요하던 중 신종참의 신고로 경찰에 연결되었다.

3. 강진여는 오전 11시 거창에 호송시켰던 바 도중에 도망을 기도하였기에 호송병이 이를 총살하였다.

4. 당 부대는 19일 오던 길을 되돌아 복귀하였다.

 

거창 북방 황산은 현재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황산마을을 말한다. 문태서의병부대의 본거지인 안의군 북상면 월성계곡(현 거창군)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는 부촌이다. 이 마을에는 조선시대 명문가인 거창 신씨 집성촌이며 종가집인 원학고가(猿鶴古家)가 있다. 1909년 이 집의 주인은 낙안군수를 지냈던 신병우의 둘째 아들인 신종삼이었다. 신종삼은 일제강점기 당시 천석꾼의 대지주로 알려져 있다.

 

418일 새벽 4시에 거창수비대 병력 46명이 긴급출동할 정도였으면 상당한 병력의 의병들이 황산마을에 쳐들어왔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오전 7시에 황산촌을 포위하고 잡은 의병은 고작 1명이다. 기록에 나타나 있지 않은 전투가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황산촌은 거창지역의 토호세력인 거창 신씨들이 모여사는 부유한 마을이었으며, 대한제국에서도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반민족적인 행위를 거침없이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지역의 거부에 속하는 거창신씨 종가 신종삼의 집에 쳐들어가서 의병자금을 내놓으라고 한 것은 당연한 행위이다. 문태서장군 의병부대의 군자금을 담당하고 있던 강진여는 신종삼에게 금 1300(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3100)이라는 거금을 요구하였다.

 

1870~1900년경 기준으로 서양 신식총 1정 가격이 40~80냥이며, 무연화약 총알 100발이 약 6.4냥이었다. 1300냥이라면 신식총 30(독립유공자기록 금액으로는 80)내외를 살 수 있으며, 탄약 100발들이 200상자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이러한 거금을 거창신씨 종가에 요구를 한 것이다.

 

다른 의병들은 퇴각하고 강진여만 남아서 인질을 잡고 거금을 확보하기 위한 단독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집주인이었던 신종삼의 밀고로 강진여는 체포되었으며, 이후 거창읍으로 압송되던 중 탈출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총살당하였다. 강진여는, 19077정미7조약(丁未7條約)에 따른 군대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되었던 시기에 문태익 의진에 가담하여 의병활동을 하였다. 문태익 의진의 부장(副將)을 맡았던 그는 19084월 전북 장수(長水)를 습격하고, 무주(茂朱)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는 등 대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친일파들에 대한 가차없는 처벌을 한 문태서의병부대

 

문태서장군 의병부대는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분자들에 대해 가차없이 처벌하였음을 알 수 있다. 426일 금산경찰서장은 전라북도 관찰사 이두황을 거쳐 내부대신 박제순에게 전라북도 관내 금산군 의병활동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1. 424일 오전 3시 용담군 이동면 장전리에 수괴 문태수가 인솔하는 폭도 40(그 중 5명은 검은 옷, 나머지는 흰옷을 입었으며, 신식총 2, 화승총 25정을 휴대하였다.)이 쳐들어와 동민 8명을 납치하여 오전 4시경 장수군 방면으로 갔다.

2. 무주헌병분견소 외 4개소는 연합토벌대를 조직하고 18일 출발하여 무주군에 도착하였다. 19일 무주군 횡천면 구천동 백련암에서 수괴 박선봉(박춘실 선봉장)의 적단과 충돌하여 2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하였다.

 

이 보고서를 분석해보면 문태서장군 의병부대가 전북 용담군 이동면 장전리(현 전북 진안군 동향면 장전마을)에 쳐들어와서 동민 8명을 납치하여 장수군 방면으로 이동하였다고 적고 있다. 문태서장군 의병부대는 모집을 공개적으로 하였으며, 지역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의병에 참여하였다. 이 보고서에 보면 지역주민 8명을 납치하였다고 적고 있는 바 이는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친일분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끌고갔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4개소의 연합토벌대가 출동하여 문태서장군 의병부대 선봉장인 박춘실부대와 전투를 벌여 겨우 2명 사살, 1명 생포의 전과를 올렸을 뿐이다. 4개소 연합토벌대의 전과 치고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만큼 의병들의 전투력이 강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주는 기록이 되고 있다.

 

같은 기간 중 특이한 상황이 벌어졌다. 426일 거창지역을 중심으로 덕유산 북부에 인접한 김천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유종환이 생포된다.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상한 독립유공자로 기록되어 있으나 일본군에 체포되어 보여준 언사만 가지고 평가한다면 의병지도자로 인정하기에는 부족함이 너무 많다. 유종환이 일본군에게 밝힌 조사 내용 중 일부만 발췌하여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그 까닭은 의병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서로 다르고 시기와 모략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경상남도경찰부장 이키 칸은 426일 유종환을 체포하여 신문한 후 다음과 같이 내부 경무국장 마츠이 시게루에게 보고하고 있다.

 

우연히 전성범이 자기 활동구역에 있어 서로 만나서 의견을 교환하고, 이후 행동을 같이 할 것을 맹서하였다. 당시 전은 부하 50명과 총기44정을 갖고 있었다. 이후 서로 제휴하여 용담, 금산, 영동의 각 군에 출몰하였던 바, 전성범은 도처에서 약탈과 횡포를 자행하고, 획득한 재물을 사사로이 쓰고, 주색에 빠져서 조금도 부하의 휴양에 사용하는 일이 없어 秋毫部下休養用意하는 일이 없어 누차 충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반성하는 바가 없었다. 따라서 확실하게 절교하였다 한다. 유는 이번 조사에서 용모를 가다듬고 목소리를 차분하게 하여 심문에 응하였으며, 전성범의 비행에 분개하여 의기가 차 올라 중상의 고통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잠시 4월 상순 전과 행동을 같이 한 것은 약 1개월간이다.

(중략)

전성범과 맹서를 끊고부터 유는 영동군의 각지를 배회하고 무주군 설천을 경유 거창군에 들어와 우두령에 나타나 어인동을 거쳐 다시 북진하여 지례군에 도달하고자 신방소(거창동북 약 오리)를 통과 중 드디어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서 왼쪽가슴에 총알이 관통하는 총상을 입고 생포되었다. 425일이다.

(중략)

의거의 목적은 일본병과의 대항이 아니므로 항상 일본군경을 피하거나 숨어다녔기 때문에 김진규의 도움을 받아 재기한 이후 일회도 일본병과 충돌한 일이 없고 따라서 총기탄약의 보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최근의 휴대하고 있던 무기들은 모두 부장 김진규가 가지고 다녔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민가에 숨겨두었던 병기는 우리 일본군경이 찾아낸 것은 물론이다.

(중략)

거창군 교항에 오모(오갑수일 것이다)가 있다. 의병이라고 말하면서 화적들이 하는 만행을 일삼고 도리에 어긋나게 양민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일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처벌하고자 하였다. 오모의 행동구역은 거창군의 북부로부터 안의군의 북부에 걸쳐있다. 전성범의 행동지구는 전북의 장수, 용담 2, 경북의 금산군, 충청의 옥천, 영동, 황간 3군 그리고 경남의 안의 등 여러 도에 걸쳐있다. 전의 부하에는 박대식이 있다. 성질이 사납고 흉폭하며 급하여 항상 양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오랜 기간동안 전성범과 행동을 같이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종종 단독으로 행동하는 일이 있다. 문태서는 소속의 부하를 전성범에게 부여하고 충청도 보은군에 거주하면서 상업에 종사하였다. 그 밖의 다른 집단은 모른다고 하였다.

 

유종환은 일본경찰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의병지도자로서 부적절한 발언을 하고 있으며, 오히려 자기의 행위를 합리화하기에 급급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첫째, 의병을 일으킨 목적이 일본병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 아니며, 전투를 벌인 적도 없다. 오히려 일본군을 피해다니거나 숨어다녔다.

둘째, 문태서장군 의병부대의 중군장이었던 전성범의병장은 의병장이 아닌 화적두목으로 악평을 하면서 총상으로 중상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도 전성범에게 강력한 적개심을 표출하고 있다.

셋째, 자기 휘하의 의병들이 소유하고 있던 총기들은 두 번째 의병 거사를 도운 김진규의 것이라고 하면서 의병장으로서의 책무를 포기하였다.

넷째, 전성범의병부대에 소속되어 있는 박대식(구체적 기록 검색 불가)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의병이 아닌 비적 수준으로 악평을 하고 있다.

유종환에 대한 평가는 추가하지 않겠다.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독립유공자이기에 논란을 벌일 필요는 없다. 다만 일본경찰 심문조서를 살펴보면 의병장으로서 자질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으며, 각 종 기록에 나타난 내용도 이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산악지역을 근거로 활동하고 있는 의병장이나 의병들이라고 다 조국애로 뭉친 집단이라고 할 수는 없다라는 씁쓸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문태서장군 의병부대는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에서는 철저하게 치안을 유지하여 지역주민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위를 엄금하였으며, 그러한 행위는 가차없이 처벌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이러한 과정에서 주민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체의 행위도 하지 않고 있다. 57일 전라북도 관찰사 이두황은 내무대신 박제순에게 금산경찰서장의 보고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관내 각 경찰서장의 폭도에 관한 보고요지는 다음과 같다.

. 57일 금산경찰서장 보고 요지

지난 밤(5. 6) 12시경 두목을 알 수 없는 폭도 약 70명이 총기30정을 휴대하고 금산군 남이면 역평리에 쳐들어와 주민들을 향해 말하기를 우리는 의병으로 목적은 양민을 구조하는데 있다. 따라서 오늘 밤 우연히 이동하는 도중에 화적 1명을 만나 이를 참살하여 두었으므로 이 사실을 금산관헌들에게 보내라고 말하고 지역주민들에게는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고 떠났다. 이러한 사실을 주민들로부터 듣고 순사를 파견하여 조사하였는데 적은 해당지역에서 떨어진 7, 8정 규모의 산기슭에(同里約七·八町山往)에서 돌로 쳐 죽인 듯한 시체를 버려둔 것을 발견하였다. 계속 조사중임.

 

의병지도자를 알 수 없는 의병 70여명이 현 금산군 남이면 역평리에 들어와서 지역주민들을 상대로 선무활동을 벌이면서 의병활동의 목적을 양민을 구조하는데 있다.’라고 공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관내에서 화적질을 하는 1명을 체포한다. 지역주민들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고 떠나면서, 체포한 1명의 시체를 금산군 관리들에게 보내라고 지시까지 하면서 치안유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체포된 화적은 산기슭에서 돌로 쳐 죽이고 시체를 공개하였다. 원문 중 일부는 해석능력이 부족하여 ()에 원문을 표기하였다.

 

동 보고서에는 실로 이상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앞서 살펴본 일본 기록에서도 종종 보여주는 비정상적인 전투가 510일 벌어진다.

. 510일 남원경찰서장 보고요지

 

마마 상등병 이하 오명은 장수주재순사(일인2)와 협력하여 58일 오후 4시 이문성(장계장 동북 약 2) 동북방에 있는 덕유산정을 점령한 적괴 문태서 박충실이 인솔하는 백여명의 적을 공격하고 전투를 벌여 (?)시간 후 적을 물리쳤다. 적의 사상은 13, 화승총 5, 1, 연명부, 화약, 기타 잡품 약간 등을 노획하였다. 아군의 피해는 없었다.

 

위 기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실로 난감하다. 7명의 일본군경이 100여명이 넘는 의병부대를, 해발 1000m이상인 고지대에서 전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덕유산 호랑이인 문태서장군과 그 선봉장인 박춘실이 이끄는 부대의 전투력을 감안한다면 이 전투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전투시간도 부정확하고 깊은 산중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어떻게 사상자를 파악할 수 있었으며, 13명의 사상자에게서 빼앗은 무기가 화승총 5, 1, 화약, 명부 등이라니? 보고서 중 이 부분은 행간을 읽어야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당시 일본군경은 의병들과 지역주민을 분리하기 위해 의병에 우호적인 특정지역 주민들을 몰살시키는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이러한 작전은 의병전쟁기간동안 지속적으로 펼쳐졌으며, 만주에서 재현되었다.

 

농소마을에서 남덕유산(1507m)까지는 직선거리로 6Km이며 의병들의 걸음걸이 속도로는 1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이다. 농소마을은 비교적 평지에 속하며 경작지가 주변에서는 가장 넓은 곳이다. 따라서 다른 지역에 비해 다소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마을이다. 이러한 지역에서 의병활동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는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의병의 활동을 지원하는 지역주민들을 감시하는 일진회 등 친일세력이 있어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군경의 활동이 없는 야간에는 의병들이 마을을 다녀갈 수 있었을 것이며, 의병들을 지원하는 지역민들의 활동은 친일세력들에 의해 파악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일에 간밤에 다녀간 의병들을 지원했던 지역주민들을 색출하여 몰살시키고 그들의 시체 옆에 약간의 증거물품들을 함께 진열했으리라 판단하는 것이 당연하다.

 

문태서장군은 의병전쟁 과정에서 발생하는 병력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끊임없이 지역주민들을 상대로 선무활동을 펼쳤으며,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였다. 일본측 기록을 살펴보면 문맥상으로 따졌을 때 납치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납치가 이루어진 상황을 분석해보면 2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소규모 인원이 특정 마을에서 납치된 경우와 많은 인원이 여러마을에서 납치된 경우이다. 전자는 친일분자 처벌을 위해 이루어진 납치이며, 후자는 의병활동을 위해 지역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경우이다. 남겨진 가족들의 입장에서는 납치가 되어야 후환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55일자로 전라북도 관찰사 이두황이 내부대신 박제순에게 보고한 공문에 이러한 내용이 잘 나타나있다.

 

폭도에 관한 관하 남원전주고부금산경찰서장의 보고 요지는 다음과 같다.

 

금산경찰서

. 55일 오후 11시경 폭도수괴 문태서는 부하 74명 가량을 이끌고 용담군 이동면 상행원에 쳐들어왔는데 그 복장은 검정옷 2, 흰옷 72명 가량으로 신식총 2, 화승총 25정 가량, 3점을 휴대하고 있었다. 동지역 면장으로부터 동 주재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각 폭도 등은 원래 문태수의 부하로서 수괴 문태수가 일시 다른 지역으로 몸을 숨긴 후에 본서 관내를 배회하고 있었던 수괴 전상진, 박춘실이 인솔하는 단체와 문태수와 합동하여 새로운 부대를 구성한 듯하다는 주새순사의 보고를 받았다.

. 56일 오전 1시경 폭도수괴 문태수는 용담군 이북면에 쳐들어와서 동면 괴목정으로부터 19명을, 보문리로부터 20명을 , 노채리로부터 15명의 양민을 납치 후 무리가 120여명이 되어 같은 날 오전 4시경 무주군 유가면 방향으로 이동하고, 그리고 또 같은 날 오후10시경 재차 용담묵 일동면 오동과 이동면 6동에 쳐들어와서 다수의 양민을 납치하여 지역주민들은 크게 두려워하고 있는 사실을 각 면장들로부터 용담주재소에 알려왔으므로 각 폭도 등은 진안과 무주군 안성의 중간 또는 용담군 이동면 무주군 유가면(현 무주군 안성면 사산리 부근)의 벽촌에 근거지를 정하고 그 지역에서 수시로 움직인다는 풍설을 들었다. 이에 조사 중에 있음.

 

55일과 6일 양일간 전북 용담군 이동면 상행원(현 전북 진안군 동향면 상향마을), 용담군 이북면 괴목정(현 전북 진안군 안천면 신괴리), 보문(현 전북 진안군 안천면 보한마을-추정), 노채(현 전북 진안군 안천면 노채마을)에 문태서장군 의병부대가 나타난다. 55일자 보고내용에는 동향면 상향마을에 74명 가량의 의병들이 들어왔으며, 문태서장군과 전상진(전성범 추정) 박춘실이 모여서 새로운 부대를 구성했다고 추정하였다. 상행원, 괴목정, 보문, 노채는 반경 4Km 안에 있는 남덕유산 기슭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5일 밤 11시에 상행원에 들어와 의병들의 영향력을 과시하였을 것이며, 6일 새벽 1시에 3개 마을에 들어와서 의병들을 모아서 이동하였으며, 이후에도 여러 지역에서 의병들을 모아 세력을 불렸다. 일본군경은 문태서장군 의병부대의 근거지를 덕유산 정상인 향적봉 부근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번 연재에서는 의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1909년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4월 말에서 5월 동안의 문태서장군 의병부대의 행적을 살펴보았다. 막대한 군자금 강요 및 모금, 지역내 치안유지, 공개적인 의병모집활동 등이 동기간 내에 이루어졌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기록을 확인할 수 없어서 안타깝지만 다른 기록들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근대사연표에 따르면 420~ 520일 사이에 문태서장군 의병부대와 관련된 활동들이 20여개 이상 기록되어 있다. 비록 자세한 내용은 아니지만 활동 개요와 출처가 남아 있어 문태서장군의 활동을 증명해줄 수 있다. 한국근대사연표에 나타난 기록은 추후 별도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글: 3.1운동 함양군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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