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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3 오후 1:33:01 입력 뉴스 > 함양뉴스

“우리 오빠는 빨갱이 아이다” 70년 한 쏟은 할머니의 절규



박명남 할머니(왼쪽 세 번째)가 젊은 시절 가족과 함께 부산 공원에서 찍은 사진. 왼쪽 첫 번째는 박명남 할머니의 어머니다. <사진: 박명남 할머니>

 

이제는 큰오빠 한을 풀 수 있을 것 같다

 

산청군 생초면에 살고 있는 박명남(84) 할머니는 최근 조카 손자에게 희망 섞인 소식을 듣고 나서 이렇게 당부했다. 팔순을 넘긴 할머니에게 뭔가 기대감을 생기게 한 소식은 지난해 1210일을 기해 2기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가슴에 품고 살았던 큰오빠의 억울함을 해소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싹트는 순간이었다. 큰오빠의 억울함은 무엇이며 지난 세월 박명남 할머니의 가족사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때는 19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8·15 광복 이후 정부 수립 전까지 해방공간이던 시기였다. 당시 박명남은 함양국민학교 4학년이었다.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고 따랐던 사람이 있었다. 큰오빠 박재득이었다. 나이 차이가 16살이나 나는 큰오빠는 아빠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그 시절 박명남이 학교를 다녀오면 큰오빠 박재득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물었다. “우리 명남이 학교가서 많이 배웠나? 재미있었나?” 그때마다 자랑하듯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속삭였다. 오빠가 안아주는 순간은 늘 행복했고 즐거움이 가득했다.

 

어린 박명남에게 큰오빠는 참 멋진 사람이었다. 인기도 많았다, 호리호리한 몸에 흰 얼굴, 또렷한 이목구비. 동네 여성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매년 815일 군민들이 모여 해방을 기념하는 경축 행사 때는 풍물패를 이끌고 춤을 추기도 했다.

 

큰오빠는 8·15 해방이 돼서야 같이 살 수 있었다. 그전까지 떨어져 살아야 했다.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었기 때문이다. 해방된 후 고향 함양으로 돌아왔으나, 다시 일본으로 갈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여의치 않게 됐다. 다행히 함양의 한전(한국전력공사)에 취직할 수 있었고, 이때 결혼해 가정도 꾸렸다. 부모님은 큰오빠에게 단칸방을 하나 장만해주었다. 이듬해 귀여운 조카도 태어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소박하지만, 행복한 삶이었다.

 

큰오빠는 조카가 태어나고 한 달 뒤, 함양 한전에서 거창 한전으로 발령을 받았다. 하루에 버스가 한 대 다니던 시절이다. 어쩔 수 없이 거창에서 자취 생활을 해야 했다. 거창으로 가는 날, 큰오빠는 태어난지 한 달 조금 넘은 핏덩어리에게 엄마 잘 지켜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게 마지막일 줄은 몰랐다. 그 길로 영영 집에 돌아오지 못했고, 그 이후로 다시는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큰오빠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은 며칠 지나서였다. 함양경찰서 형사들이 큰오빠를 잡아갔다고 했다. 잡혀간 이유는 며칠 전 지곡면에서 삐라가 뿌려진 사건이 있었는데, 큰오빠가 연관이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듣기까지 부모님은 큰오빠가 잡혀간 것을 모르고 있었다. 큰오빠 뿐만 아니라 함양의 다른 청년 25명이 대거 잡혀갔고, 이들 가족들을 통해 전해 듣게 된 것이다.

 

큰 오빠가 잡혀간 후 어린 박명남은 매일 아침과 저녁 함양경찰서를 오가는 게 일상이 됐다. 큰오빠에게 도시락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경찰서 앞에는 순사가 지키고 있어 매일 가도 무서웠으나 오빠를 위해서는 안 갈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보고 싶은 큰오빠 얼굴은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대신 맛있게 먹은 빈 도시락통을 들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오늘도 오빠 얼굴 안보이주더나?”

 

안 보여주던데요

 

큰오빠의 안부가 궁금했던 어머니는 매일같이 물었다. 답은 항상 같았다. 도시락통을 통해서만 오빠를 느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이제 도시락 안 갖다 줘도 된다

 

한 달 정도 큰오빠에게 도시락을 배달했을 즈음이었다. 학교에 가며 큰오빠 도시락을 달라고 하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 큰오빠가 이제 집으로 돌아오는 줄로 생각했다. 그날은 발걸음이 가벼워지며 기쁜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집에 돌아와서는 큰오빠를 내내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밤늦은 시간까지 큰오빠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두 달 정도 큰오빠에 대한 소식은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함양경찰서를 찾아가 장남의 소식을 물었다. 하지만 모른다, 돌아가라라는 말만 들어야 했다. 속앓이하던 부모님은 함양과 산청에 유명하다는 점집을 찾아다녔다. 장남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점쟁이들에게 묻고 다녔을 만큼 부모님의 속은 타들어 갔다. 사라진 아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부모님의 심정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한 고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의 소식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 부모님의 대화를 엿듣게 된 것이다. 좀체 잠을 이루지 못한 어느 날 부모님은 대화 중에 이렇게 말했다.

 

밤에 군인들이 트럭에 태워서 실상사 뒤에 가서 쥑있단다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오빠가 죽었다니! 날벼락같은 소식은 부모님이 친하게 지내던 상동 살던 함양경찰서 곽 순경이 전해준 이야기였다. 곽 순경에 따르면 경찰서에 잡혀있던 큰오빠를 비롯한 청년들은 지리산 빨치산 토벌을 위해 함양초등학교에 주둔하던 국군 3연대가 트럭에 태워 끌고 가 학살했다고 했다.

 

함양초등학교 24회 졸업생. 1945~1948년 사이 함양 상림에서 졸업생 친구들과 동창회를 마치고 찍은 기념사진. 사진 첫 줄 제일 오른쪽이 박명남 할머니의 오빠인 박재득씨. <사진: 박명남 할머니>

 

믿고 싶지 않았고, 거짓이길 바랐다. 하지만 이듬해 봄 그렇게 애타게 찾던 큰오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학살은 사실이었다. 어머니가 길을 나섰다. 큰오빠와 같이 끌려간 청년들의 부모와 함께 실상사를 찾아간 것이었다.

 

현장은 참혹했다고 한다. 구덩이를 파서 사람을 죽여 놓고도 묏등을 쓰지 않아 시신들은 산짐승들이 헤집어 놓은 상태였다.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지만, 어머니는 큰오빠의 흔적을 간신히 찾아낼 수 있었다. 옷차림 때문이었다. 일본에 살았던 큰오빠는 25명 중 유일하게 일제 내의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내의에는 팔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유골이라도 챙기려 했으나 경비 서던 군인들은 못 가져가게 막았다.

 

땅을 치며 통곡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 생떼 같은 자식이 억울하고 허망하게 죽은 데다 흔적만 간신히 찾아 놓고도 수습할 수 없었던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생각할수록 눈물만이 가득하다.

 

어머니는 그렇게 장남을 가슴에 묻었다. 그리고 낮이나 밤이나 허공을 바라보며 아이고, 아이고통곡하는 일이 일상이 됐다.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후 집은 적막으로 변했다. 큰오빠의 선배, 동료, 후배 등 지인들이 집에 와서 울고 가는 일이 빈번했다. 하나같이 재득이 형님은 너무 억울해요라며 애통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억울함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또 다른 고통으로 이어졌다. 동네에서 빨갱이 집이라고 소문이 난 것이다. 억울해서 한이 맺힐 정도인데, 그 억울함마저 쉽게 말하기 힘들었다. 빨갱이 집이라는 소문은 엄청난 주홍글씨였다.

 

함양경찰서 허 형사는 걸핏하면 집에 쳐들어왔다. 아버지에게 빨갱이 집이 무슨 밭을 갖고 있냐면서 신천리 밭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괴롭혔다. 참 못된 사람이었다. 자식을 그렇게 잃은 것도 분하고 억울한 부모님을 죄인 취급하며 마구 대했다.

 

그나마 옆집에 세 들어 살던 함양경찰서 임 경사가 고마운 사람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 부모님에게 이야기해 박명남을 경찰서 급사로 데려다 일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했던 박명남은 함양경찰서 급사로 일하며 월급 2000원을 받았는데, 월급은 오롯이 가족을 위한 곡식을 사는 데 사용됐고 뿌듯함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뿌듯함도 잠시였다. 일을 석 달 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허 형사가 함양경찰서장과 동료들에게 빨갱이 동생이 급사로 일하면 안된다며 난리를 쳤던 것이다. 날벼락을 맞듯이 급사로 채용할 수 있도록 해준 임 경사는 서상지서로 쫓겨 가야 했다.

 

그 이후로 억울하게 빨갱이 가족이 된 박명남은 긴 세월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험난했던 시간들은 생각하면 가슴에 맺힌 한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어릴적 당한 억울함은 평생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됐다.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집안의 기둥이었던 큰오빠가 그렇게 세상을 떠난 것은 무거운 돌이 되어 지금도 할머니가 된 박명남의 가슴에 맺혀 있다. 어떻게든 큰오빠의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는 생각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발족 소식을 듣던 날, 박명남 할머니는 마른 눈물을 훔치며 조카 손주에게 이렇게 말했다. 차분하게 말씀했으나 오랜 시간의 한이 담긴 절규였다.

 

이번에 잘해서 꼭 너거 할아버지, 우리 오빠를 누가, 왜 죽였는지 알아내라. 우리 오빠 빨갱이 아이다

 

 

 

 

박정주 기자(hy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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