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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8 오후 3:41:59 입력 뉴스 > 관광여행

운남선생의 여행기-진주성 답사기



* 종    목 : 사적  제118호 / * 명    칭 : 진주성(晋州城)  / *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 * 수량/면적 : 173,036㎡ / * 지 정 일 : 1963.01.21 / * 소 재 지 : 경남 진주시  남성동, 본성동 / * 시    대 : 조선시대 / * 소 유 자 : 국유,공유,사유 * 관 리 자 : 진주시 

공북문 앞에서 주말에는 수문장 교대의식을 20008년부터 행하고 있다. 2층의 팔작지붕으로 당당하게 서있다.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의 성지(聖地)이다. 본시 토성이던 것을 고려조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석축 하였다.

 

진주성의 성곽은 70년대초 박정권때 성안의 거주민들을  모두 이주 시키고 재축성 했으나 부족한 부분이 많다 .

 

조선조 선조 24년(1591) 7월, 경상감사 김수(金수:1537∼1615)는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外城)을 쌓았다. 동 25년(1592) 10월,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1554∼1592)이 3,800명의 군사로서 3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인 계사년(1593) 6월에는 전년의 패배를 설욕코자 10만 여명이 또 침략하여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이때 논개(論介)는 적장을 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하였다.

 

공북문을 들어섰다. 안쪽모습이다.

 

기록에 보면 1605년(선조 38)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이 진(鎭)을 성내로 옮기고 성이 너무 넓어 수비가 곤란하다 하여 내성을 구축하게 되었는데, 성은 자연 촉석루를 중심한 현 진주공원 일대의 외성과 현재의 성내동(城內洞) 주변 내성의 둘로 나눠지게 되었다.

 

▲ 김시민장군 동상

김시민(1554∼1592) 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 안동. 자 면오(勉吾). 시호 충무(忠武). 목천(木川)출생. 1578년(선조11)무과에 급제. 훈련원판관이었을 때 군사에 관한 일을 병조판서에 건의한 것이 채택되지 않아 관직을 버렸다. 91년(선조24) 진주판관이 되었는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죽은 목사(牧使)를 대신하여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무기를 갖춘 공로로 목사가 되었다.


사천(泗川). 고성(固城).진해(鎭海)등지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올라 금산에서 다시 적을 격파하였다. 그해 10월 적의 대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불과 3.800명의 병력으로 7일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적을 격퇴하였으니 임진왜란의 삼대 대첩인 진주성대첩이다. 그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1604년(선조37) 선무2등공신에 추록되었으며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고, 뒤에 영의정 상락부원군에 추증되었다. 진주의 창렬사에 배향되었다.이분의 묘소는 원래 충주에 있다  충주호 담수로 인하여 괴산의 충민사로 옮겨져 배향하고 있다.

▲ 현재 진주성 관광안내도

 

▲ 옛 진주성도(晉州城圖)

현재의 진주성은 내성(內城)임을 알수있다.현재는 왼쪽 짙은 부분 내성만 남아 있고, 오른쪽 외성(外城)과 윗쪽의 큰못 대사지(大寺池) 일제초기 뜯어 메어 일제에 의한 공공건물과 학교부지와 시가지로 만들어 버렸다. 국권 상실로 인한 안타까운 일이다

 

그뒤 병사 김태허(金太虛)가 1607년 포루(砲樓) 12개를 증축하였고, 18년(광해군 10) 병사 남이흥(南以興)이 성 수축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지금의 진주성은 대략 이때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진주성은 언덕에 있어서인지, 성곽자체는 높지가 않다.

동 37년(1604)에는 합포(合浦, 마산(馬山))의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겨 이래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있었고, 고종 32년(1895)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 건양 원년(1896)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의 감영이 있었다. 그리하여 1925년까지는 경상남도의 도청이 있었다.

 

▲ 북암문이다. 

 

성의 둘레는 1.7㎞이다. 성내(城內)에는 촉석루·창열사·의기사·북장대·서장대·영남포정사·국립진주박물관·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촉석문·공북문·호국사 등이 있다.

 

▲ 그 앞에는 비석군이 있는데, 진주성과  진주시내에 널려져 있던 비석들을 모아놓았다. 대부분 벼슬아치들의 선정비다
진주성의 정문격인 공북문이다. 拱北이란 두 손을 맞잡고 北쪽의 임금을 공경한다는 뜻이다. 17세기 이후에 그려진 진주성도(晉州城圖)에 나오는 진주성의 정문으로 2002년에사 복원되었다

 

▲ 북암문옆에 북장대(北將臺)다.

북장대는 임진왜란때 격전이 벌어진 곳으로 광해군(光海君) 10년(1618)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중건한 건물이다. 그후 여러번의 중수(重修)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북장대는 군사 건물 중에서 조선조 중엽에 속하는 다락집형으로 후대에 세워진 군사 건물의 모범이 되었다. 북장대는 내성(內成) 북쪽 끝 제일 높은 곳에 있어 낭떠러지 밑의 성밖은 물론 성내와 외성(外成)에 포진(布陣)한 성병(城兵)까지도 지휘할 수 있다. 그래서  편액(扁額)을 진남루(鎭南樓)라 하였다


▲ 진주시가 한눈에 보인다

 

▲ 안쪽에 진남루란 편액이 걸려있다.

 

▲ 북장대를 뒤로하고, 여장을 따라간다.

 

▲ 저 앞이 포루다.

진주성 내성,외성에 포루가 12곳 있었는데, 복원과정에서 상징적으로 하나만 복원하였다 한다. 진주대첩도 화력에서 뛰어난 무기인 총통이 큰 역활을 했다.

 

▲ 총통을 크기별로  전시해 놓았다. 사거리 1Km 내외로서 제일 큰 총통을 천자총통이라고 부르며 다음은 지자총통,현자,황자,,,

 

▲ 언덕에 있다고 하지만, 성곽높이가 낮은것은 내성이기 때문이다.

 

▲ 서암문앞에 창렬사(彰烈祠)다.

이 사당(祠堂)은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절한 분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정사호(鄭賜湖)가 건립하여 선조(宣祖) 40년(1607)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그후 제1차 진주성싸움에서 대승리를 거둔 김시민장군(金時敏將軍)을 모신 충민사가 고종(高宗) 5년(1868) 대원군(大阮君)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훼철되자 장군의 신위를 이곳으로 함께 모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곳에는 지금 충무공(忠武公) 김시민 장군의 신위를 맨 위 자리에 모시고,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충청병사 황진(忠淸兵使 黃進) 경상우병사 최경회(慶尙右兵使 崔慶會) 등 39분의 신위를 모시고 있으며 매년 4월이면 전국의 후손들과 함께 큰 제사를 올리고 있다. 

 

▲ 문을 들어가면 다시 삼문이 나오고, 그 안에 창렬사다. 

 

▲ 창렬사옆에 호국사(護國寺)란 절도있다. 

진주성안 서장대와 창렬사 사이 골자기에 자리잡고 있는 이 사찰은 창건 연대가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시대 창건된 것으로 원래의 이름은 내성사 였다고한다. 고려말기에 왜구를 막기위해 진주성을 고쳐쌓고 승병을 기르기위해 창건된 것으로 생각되는 이 절은 임진왜란때는 승군의 근거지가 되었다. 계사년의 큰 난에는 승군의 본거지가 되었던 것인데 많은 승병들이 끝까지 싸우다가 성이 함락됨에 따라 함께 장렬히 전사하여 나라를 지켰으므로 전란이 끝난 후에 나라에서 이를 찬양하여 호국사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최근에 진주성을 정화하면서 일주문 자리가 발견되어 새로세웠으며 사찰의 건물들은 모두 근년에 새로 지은것들이다. 재미있는것은 산이 없는 데도 호국사 뒷 언덕을 월영산으로 명명했다는 것이다.

 

▲ 서암문에서 계단을 오르니 서장대(西將臺)다. 서장대 오르는 계단

 

▲ 서장대(西將臺)

진주성(晋州城) 서문(西門)의 지휘장대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보면 회룡루(回龍樓)로 나오는데 규모는 작았으나 촉석루와 같은 다락집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지금의 서장대는 허물어진 것을 1934년 독지가 서상필(徐相弼)씨가 중건한 것으로(친구의 조부님)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목조와가이다.원래 서장대의 현판은 없어지고 지금의 현판은 1979년 은초(隱憔) 정명수(鄭命壽)의 글씨이다.

 

▲ 서장대에서 바라본 남강.
보이는 다리는 진주가 천년고도라 하여 천수교로 명명했다 

 

▲ 서장대를 지나 성벽을 따라간다.

 

▲ 또다시 암문이다.

 

▲ 빙 둘러오다 보니 왼쪽 건너편이 출발한  공북문이다.

 

▲ 촉석(矗石樓)
촉석루는 진주의 상징이자. 영남 제일의 명승이다. 진주성 남쪽 석벽 위에 우뚝하여, 웅장한 위풍은 진주성의 위상을 대변하고 있다. 일명 장원루(壯元樓) 또는 남장대(南將臺) 라고도 한다.  고려조 고종28년(1241) 진주목사 김지대(金之岱:1190 - 1266)가 창건하고, 충숙왕9년(1322) 목사 안진(安震: ? - 1360)이 재건하였다. 우왕5년(1379)에는 해구의 침략으로 불탄 것을, 조선조 태종13년(1413)에 목사 권충(權衷)이 중건하였고, 성종22년(1491)에는 목사 경임(慶 )이, 선조16년(1583)에는 목사 신점(申點)이 중수하였다. 선조26년(1593)에는 왜적의 침략으로, 진주성이 함락되는 와중에 또 불탄 것을, 광해군10년(1618)에 병사 남이흥(南以興)이 중건하였다.
경종4년(1724)에는 병사 이태망(李太望)이 중수하였고, 1950년 6.25전쟁으로 또 불탄 것을(이전은 국보였다)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에서 중건하였다. 하륜(河崙: 1347 - 1416)의 「촉석루기」를 비롯, 많은 시인묵객의 시서화가 오늘에 전한다.

 

▲ 의기사(義妓祠) 안에 있는 논개의 영정
이곳은 제2차 진주성(晋州城) 싸움 뒤 왜장(倭將)을 껴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한 논개의 영정(影幀)과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이다.
논개는 임진왜란중 계사년 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진주성이 함락되자 논개는 왜장을 누 아래 의암 바위로 유혹하여 그를 껴안고 강물에 투신한 것이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적에게 더럽힘을 당하는 것을 피하여 자결한 여인들은 많았지만 논개는 제 한 목숨을 던져 온 성민의 원수를 갚았으니 그 의로운 기개를 어찌 장하다 아니 하리요!
논개사당은 영조(英祖) 16년(1740)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가 건립했는데 지금의 건물은 1960년 진주의기 창렬회에서 재건하였으며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 의기사

 

▲ 남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촉석루. 나룻배는 움직이지 않고 그냥 365일 분위기만 잡고있다.

 

▲ 밖으로 나가기전에 영남포정사문루(嶺南布政司門樓)가 있다.

조선시대 경상남도 관찰사가 업무를 처리하던 영남포정사의 정문이다.
조선 광해군 10년(1618) 병사를 지내던 남이흥이 내성의 동쪽문을 고쳐 세우고 옆에 대변루(待變樓)를 새로 지었는데, 이것이 망미루의 본래 건물이다. 후에 영남포정사라고 하였으며, 경상남도 도청을 부산으로 옮기기 전까지 도청의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망미루(望美樓)’라는 현판은 수원 유수를 지낸 서영보가 쓴 것이다.

 

▲ 남강과 어우러진 진주성의 야경들이다.

   연인과 함께하는 밤은 낮보다 더 아름다울수 있다.

 

 

▲ 진주시 야경

 

 

 

 

 [진주문화원 이사 배 희 정]

 

 

 

 

 

이혜정기자(hy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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